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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8.13 18:48 수정 : 2008.08.16 11:03

명품클럽이여 담임을 괴롭혀라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씨네21>과 함께하는 불량추억 공모전 수상작 3등 김혜진
의자에 껌 붙이기·분필 분질러 놓기 등 찌질한 말썽을 부리다 기어코 먹인 강력한 한 방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나는 ‘담임의 숨소리조차 싫어했던’ 당시 많은 여고생들 중에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담임선생님이 왜 그렇게 싫었는지 미스터리다. 입시교육에 대한 폐해로 ‘공부를 강요하는 담임선생님’과 ‘과포화 상태의 스트레스를 이겨내야 했던 학생’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회적 불화가 아니었을까.

지각비 돌려받기와 아이스크림 사건

어찌 됐건, 이맘때처럼 뜨거운 태양이 교실을 달굴 때쯤 나는 일명 ‘명품클럽’이라는 모임으로부터 은근한 초대를 받게 되었다. 명품클럽은 교실 뒷자리를 점령하고 소심하게 과자나 떡 같은 것을 하나씩 집어먹는 것으로 반항 같지 않은 반항을 하던 조무래기들의 모임이었다. 당시 나는 명품이 어떤 종류의 물건을 의미하는지조차도 몰랐거니와 그런 어설픈 녀석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심드렁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녀석들은 일급기밀이라도 되는 양 사물함에서 작은 공책 하나를 꺼내왔다. 그들은 나를 둘러싸고 벽을 쌓은 뒤에야 한가운데서 공책을 펼쳤다. 거기에는 날짜와 함께 희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던 녀석이 불량하게 껌을 찍찍 씹으며 소곤거렸다.

“명품은 엄마 거나 집에 있는 거 아무거나 가져오면 돼. 중요한 건 하성철(가명)을 괴롭히는 거야. 하루에 한번.”

하성철은 우리 담임의 이름이었고 나는 공책을 뒤적거리며 한참을 웃다가 명품클럽의 여섯 번째 회원이 되었다. 명품클럽의 규칙은 이러했다. 매일 돌아가며 담임을 괴롭히는 것이 의무였는데, 한 달 단위로 이를 기록해 가장 저조한 회원이 용돈을 털어 맛있는 것을 사는 것이었다. 단, 횟수에 상관없이 이른바 ‘강력한 한 방’을 먹이면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그 성과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회원들은 열과 성을 다해 담임을 괴롭힐 방법을 찾느라 골몰했다. 명품 클럽의 활약상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담임선생님 자동차 유리에 환타 뿌려 놓기. 지휘봉 끝에 진득진득한 테이프 자국 남겨 놓기. 선생님 책상 의자에 껌 붙여 놓기. 선생님 책상 밑에 먼지 모아 놓기. 선생님 슬리퍼에 매직으로 낙서해 놓기. 선생님이 심부름 시킬 때는 누군가를 보내기 전까지 절대 나타나지 않기. 창문 닫아 놓고 오다리(조미 오징어) 먹고 냄새 풍기기. 책 가져오지 않기. 분필 모두 분질러 놓기. 양호실 가서 돌아오지 않기 등등. 우리는 공책을 꺼내 놓고 둘러앉아 자신이 한 일들을 기록하며 모두 함께 킬킬대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었다.

우리의 활동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한여름의 아이스크림 사건’이었다. 당시 우리 반에는 지각생이 많아 지각생을 대상으로 벌금을 모으고 있었다. 보통 지각비는 100원이었는데 습관적으로 지각을 하는 아이는 500원씩, 1000원씩 내기도 했다. 그 벌금은 거의 우리 명품클럽 회원들의 돈으로 불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 날 우리는 이 지각비를 되돌려 받자는 데 합의했다. 아침 조회 시간에 용감하게 그 말을 꺼낸 건 나였다.

“뭐? 지각비를 돌려 달라고?”

담임은 기가 차다는 듯이 큰소리로 화를 냈다. “내가 너희 코묻은 돈을 갈취라도 했냐”며 소리치기도 했다.

“어쨌거나 학생들 돈이니 반장을 중심으로 저희가 관리하겠습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준비한 말을 속사포처럼 내갈겼다. 명품클럽 회원들의 모기만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담임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내 목소리도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학급비로 쓸려 그랬더니 이눔들이 나를 도둑놈 취급하고 앉아 있어! 너 따라와서 가져가!”

어리고 철없던 시절… 선생님 죄송합니다

담임이 세차게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지각비를 냈던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와 나를 에워쌌다. 그 바람에 나는 다시 의기양양해져서 교무실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그동안 모은 지각비를 돌려받았는데, 선생님이 꼼꼼히 매일매일 기록해 놓은 흔적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며 교실로 돌아오자마자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자며 난리였다. 친구 둘이 돈을 가지고 사라져 버렸다. 그 소란스러움이 조금 가신 뒤에 들어온 담임은 자신의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아무 말이 없었다. 곧이어 아이들이 들이닥치고 교실은 아이스크림 쟁탈전으로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그 소란스러움이 다 진정될 무렵, 모두들 아이스크림을 맛보며 웃음을 짓고 있는데 담임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한테 먼저 주는 법도 없냐 그래! 어느 놈 하나 먹어보라는 소리가 없어!”

그제서야 아이들은 쭈뼛거리며 남는 아이스크림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스크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뒤늦게 반장이 자신이 먹던 아이스크림을 건넸지만 담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 웃고는 교실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버릇없고 염치없었던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너무 철이 없었던 걸까. 지금까지 명품클럽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져 있지만 만약 고등학교 때 은사님을 다시 뵙게 된다면 그때는 너무 어렸었다고 웃으면서 용서를 빌고 싶다.

김혜진/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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