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8.08.27 18:55 수정 : 2008.08.27 18:55

[매거진 esc] 여기자 K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

기자 생활 8년, 확실히 늘었다고 유일하게 떠벌릴 수 있는 건 맷집이다. “혹시, 기자 맞으세요?” 내 버벅거리는 질문을 받고 진짜 궁금해 되묻는 경우부터 “당신 기자 맞아!” 삿대질 형까지 들어봤다. 나도 그게 궁금하다. 겉모습부터 텔레비전 속 이지적인 기자들과 한참 멀어, 한 선배는 “비행청소년 잠입취재하면 절대 들키지 않을 인상”이라고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조언도 했다. 그런 말 하도 들어 이제는 굳은살이 올랐는지, “아 예 기자 맞고요. 그건 그렇고…”라며 “밥 먹었냐”는 질문에 답하듯 넘어갈 수도 있게 됐다.

2001년에만 해도 이런 질문에 상처 꽤 받았다. 한 대형 약국에서 관절염 환자들에게 불법 스테로이드 약을 마구 파니 손님인척 확인해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가당치 않다고 여겼다. 손님 대부분 나이 지긋한 분들일 텐데, 나처럼 파릇파릇하고 예리해 보이는 기자를 보내면 단박에 알아챌 거라 믿고 싶었다. 녹음기까지 들고 떨며 약국에 가니 손님이 바글바글한데, 검은 머리 젊은이는 역시 나 혼자인 듯했다. “할머니가 관절이 아파 제가 대신, 엄마가 바쁘다고 해서…” 들킬까 봐 묻지도 않은 말을 두서없이 해대는데 약사가 심드렁하게 약을 내줬다. ‘어, 내가 연기를 너무 잘 했나?’ 약을 한 보따리 받고 기사도 썼다. 그런데 그러거나 말거나 약국은 버젓이 장사를 계속했다. 열불 난 팀장이 다시 가보라는데 나는 이번엔 들키지 싶어 잔뜩 졸았다. 내가 다녀간 뒤 곧 기사가 나왔고 당시에 젊은이는 나밖에 없었으며 거짓말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니 기억에 남았을 것 같았다. “이번엔 할아버지까지 아프셔서”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약사는 또 추호도 의심 없이 약을 내줬다. ‘너보다는 저 할머니가 기자로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약사에게 나는 묻고 싶었다. “정말 저 모르시겠어요?”

그래도 세상엔 아직 인정이 남아있다.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한 유명 작가에게 밑져야 본전이란 마음으로 전화했는데 의외로 질문지를 보내달란다. 당황해버렸다. 얼기설기 질문을 엮어 보냈더니 덜컥 하겠단다. 나중에 왜 응했느냐고 물었더니 작가가 “너무 초짜 같아 내가 안 해주면 엄청나게 깨질 것 같았다”고 말했다. 질문지를 보고 그런 확신을 굳혔다고 한다.

수습 때 한 선배가 나한테 ‘앵벌이 취재’라고 이름 붙인 적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고, 도와주지 않았다가는 당장 직장에서 쫓겨나고 말 것처럼 보여 취재원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고도의 심리 전술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8년차가 되어서도 수습처럼 취재원의 측은지심을 건드리니 나는 진정 앵벌이 취재 기법의 대가가 돼 가고 있나 보다. 비행청소년 잠입취재하기엔 이제 나이 들어버렸지만 그래도 주부도박단을 들키지 않고 몰래 취재하기엔 최적의 외모 조건을 갖추고 있으니 나름대로 경쟁력 있는 거 아닐까?

광고

관련정보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