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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03 17:43 수정 : 2008.09.03 17:43

베티 데이비스(왼쪽)와 그가 남긴 장난감들.

[매거진 esc] 김혁의 장난감공화국

뉴욕 출장을 계획할 때면 가능한 한 일요일을 끼고 가려고 한다. 뉴욕의 중심 맨해튼에서 발견하는 벼룩시장의 ‘손맛’ 때문이다. 이 길의 대략 28번가를 전후한 곳은 도심 한복판인데도 의외로 많은 유료주차장이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맨해튼의 골동품 수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명소였다.

지금은 상당수의 빈터가 건물로 둔갑했지만 벼룩시장이 한창일 때 그곳의 일요일은 증조·고조할아버지의 티스푼을 가지고 나온 할머니부터 아프리카·중국에서 팔아먹기를 작정하고 들여온 물건까지 각양각색의 물건들이 있었다. 몇 년 전 그곳에서 아주 귀한 장난감을 찾았다. 1930~40년대 할리우드 인기 여배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는 베티 데이비스의 장난감들을 발견한 것이다.

70여년 전의 배우이다 보니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겠지만, 그녀는 ‘주말의 명화’로 한두 번씩은 봤음직한 <소문난 여인>, <이브의 모든 것>의 여주인공이자, 아카데미·베니스·칸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모두 탄 유일무이한 배우다. 1980년대 킴 칸스의 노래 ‘베티 데이비스 아이’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다.

1920년대 독일의 슈타이프(Steiff)에서 출시한 사자와 코끼리의 봉제장난감이었다. 평소 베티 데이비스가 독일제 봉제인형을 모았다는 얘길 들은 적은 있지만, 막상 그곳에서 실물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던지….

컬렉터들 사이에도 꽤나 화제가 됐던 물건이라 대형 앤티크 가게에서 발행한 보증서도 끼여 있었다. 그것을 판 베티 데이비스 아들의 친필 편지도 보였다. ‘내 어머니 베티 데이비스가 그의 손자들, 즉 나의 아이들에게 준 것이다…’라는 쪽지였다. 그 글을 읽고 이제는 낡아 까슬까슬한 보푸라기마저 가엽게 느껴진 인형들을 만져 보니,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베티 데이비스가 사랑하던 장난감들이 아들과 손자를 거쳐, 또 누군가를 거쳐 뉴욕 맨해튼의 한 벼룩시장에서 낯선 동양 남자의 손에 쥐어쥔 것이다.

‘돈이 없어서 팔았을까?’ 뭐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지만 영원으로 이어지지 못한 한순간의 그 찬란함이 인형의 섬유 질감 사이사이로 솟아나는 것만 같았다.

김혁 장난감수집가·테마파크기획자 blog.naver.com/khe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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