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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혀가 애무할 때…언어는 위스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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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훌륭한 음식을 먹고 난 뒤 그 감동을 온전히 전할 형용사와 표현들
혀가 감지하는 맛의 종류는 단맛·쓴맛·신맛·짠맛과 얼마 전 일본 과학자들이 발견했다는 감칠맛(umami)등 다섯 가지다. 맛을 직접 표현하는 우리말 형용사 역시 많지 않다. 그러나 5개의 숫자를 순열하면 120가지 경우의 수가 생기는 것처럼, 사람이 요리에서 느끼는 맛의 종류는 훨씬 다양하다.
필사적으로 올린 사진 밑 설명은 “맛있어염”
‘말문이 막힌다’는 표현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과수 폭포 앞에서 적당한 형용사를 찾지 못한다. 훌륭한 음식을 먹었을 때도 비슷하다. 감동을 온전히 요리사에게 전하고 싶지만 형용사는 금세 바닥난다. 가장 추상적인 예술인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진정한 감동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며 코웃음 칠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의 수많은 맛집 블로거들을 보면 맛을 표현하려는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된다. 음식 맛을 공유하기 위해 혀를 공유할 수는 없다. 그래서 블로거들은 필사적으로 사진을 올린다. 그러나 커다란 사진 밑의 사진 설명은 대부분 “맛있어염” 따위다.
요리를 만들고 먹는 것은 문화적인 행위다. 자기가 먹는 음식이 뭔지 알고 느끼고 표현하는 것은, 음식을 먹는 행위를 그저 고픈 배를 채우는 본능적 행위나 돈 많은 미식가들의 레스토랑 별점 매기기 놀이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준다. 고금의 문학가, 저술가들이 맛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굳이 알아본 까닭이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한 것의 역사를 살펴본다는 점에서, 이 기사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용으로 시작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는 사진가인 부인과 스코틀랜드를 여행하고 나서 <위스키 성지 여행>(문학사상사)을 썼다. 이 책에는 위스키 맛에 대한 소설가의 절실한 표현이 담겨 있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언어는 그저 언어일 뿐이고, 우리는 언어 이상도 언어 이하도 아닌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일들을 술에 취하지 않는 맨 정신의 다른 무엇인가로 바꾸어 놓고 이야기하고 그 한정된 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아주 드물게 주어지는 행복한 순간에 우리의 언어는 진짜로 위스키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적어도 나는-늘 그러한 순간을 꿈꾸며 살아간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하고.”
같은 단카이 세대(일본에서 47년~49년 사이에 태어나 전공투를 겪은 베이비붐 세대)지만, 소설가 무라카미 류는 하루키보다 훨씬 자신만만하다. 마치 모든 맛을 자신이 표현할 수 있다는 듯이. 요리를 소재로 쓴 단편집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작가정신)에는 감각적인 표현이 많다. 세 번째편 ‘열한 번 성형 수술한 여자’는 로스트 프라임리브스(최고급 쇠갈비를 살짝 구운 것)가 소재다. 무라카미 류는 이 쇠고기의 맛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웨이터가 잘라준 짙은 핑크색 살코기를 입 안으로 넣는다. 늘 그렇지만 몹시 잔혹한 짓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입 저 안쪽의 점막을 아기의 혀가 애무하는 듯한 느낌이 들고, 배어나온 육즙이 목을 자극하여 바르르 떨리게 한다.”
하루키·류·황석영의 말맛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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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농촌진흥청원예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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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를 종종 글감으로 삼는 문학가 가운데 한국에서는 소설가 황석영을 빼놓기 어렵다. 장기수와 그의 연인을 소재로 한 <오래된 정원>(창작과비평사)의 많은 부분은 맛에 대한 표현에 할애된다. 주인공 오현우가 감옥에 갇히기 전 한윤희와 함께 머물던 갈뫼에서의 추억은 먹거리에 대한 추억과 겹친다.
“우리가 첫 번째로 상추를 따다가 점심을 먹었던 일 생각나셔요? 아직 잎이 다 자라지는 않았지만 손바닥 반 만큼씩은 되었죠. 두 석 장을 겹치면 밥을 그득히 쌀 수가 있었지요. 여린 잎에 쌈장을 묻혀서 입에 넣으면 생명의 향기가 가득 차는 것 같았어요.”
<황석영의 맛과 추억>(디자인하우스)에는 맛에 대한 표현과 탐닉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홍탁 삼합편이 대표적이다.
“한 입 씹자마자 그야말로 오래된 뒷간에서 풍겨 올라오는 듯한 가스가 입 안에 폭발할 것처럼 가득 찼다가 코를 역류하여 푹 터져 나온다. 눈물이 찔끔 솟고 숨이 막힐 것 같다. 그러고는 단숨에 막사발에 넘치도록 따른 막걸리를 쭉 들이켠다. 잠깐 숨을 돌리고 나면 어쩐지 속이 후련해진다. 참으로 이것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혀와 입과 코와 눈과 모든 오감을 일깨워 흔들어버리는 맛의 혁명이다.” 그는 에스프레소에 대해서는 “찐득하고 꺼룩한 것이 한약의 용액과도 같다”고 표현했다.
진보주의자는 맛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소박한 밥상>(Living the Good Life)(헬렌 니어링·디자인하우스)을 쓴 사회주의자 헬렌 니어링은 아예 ‘맛의 추구’를 거부했다. 그는 덜 먹고, 채식을 하고, 요리 말고 다른 생산적인 여가에 힘을 쏟으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 책에는 맛에 대한 표현이 없다.
“미식가적 감수성 없는 생태주의자는 불쌍”
진보파는 모두 금욕주의자일까? 86년 슬로푸드 운동을 주창한 이탈리아의 사상가·언론인 카를로 페트리니는 이런 금욕주의에 반대한다. 그는 <슬로푸드, 맛있는 혁명>(이후)에서 “생태적 감수성이 없는 미식가는 바보지만, 미식가적 감수성이 없는 생태주의자는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당하게 음식은 즐거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자도 먹는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며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럼으로써 이른바 ‘미식가’들과 금을 긋는다.
“어떤 맛과 향은 우리가 잊고 지내던 인생의 시기로 우리를 바로 데려다 놓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나는 브루스(치즈로 만든 크림)를 펴 바른 빵조각이 화덕에 놓여 있을 때 공기 중에 감도는 향을 잘 기억할 수 있다…지금도 이 맛은 내 기억에 새겨져 있고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특별하고 중요한 인생의 경험과 연결되었다. 이 기억들은 미각과 후각적 기억을 언급하지 않고는 거의 묘사할 수 없을 정도다.”
요리를 만들어준 사람에게 맛을 제대로 표현한다면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는 찬사가 될 것이다. 그 대상이 추석날 음식을 만드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아내나 남편이 될 수도 있겠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ㆍ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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