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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17 17:36 수정 : 2008.09.17 17:36

〈칸트의 동물원〉

[매거진 esc] 이다혜의 한 줄로 한 권 읽기

〈칸트의 동물원〉
이근화 시, 민음사 펴냄

(전략) 그러나 구체적이고 가혹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소세키의 문을 날마다 두드렸다/ 유리문이었다/ 소세키도 화가 났고/ 생각이 안 풀렸고/ 추억에 잠겼다 (후략)

멘토 갖기가 유행이라고 한다. 상담 상대 혹은 스승이라는 뜻의 멘토가 유행을 타게 된 이유는 당연하게도 자기계발이다. 좋은 인생을 사는 사람을 멘토로 삼는 게 아니라 잘나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을 멘토로 삼아 “나도 성공해 보자”라는 뜻이다. 대기업에서는 젊은 사원들의 퇴직 방지에 입사 선배의 멘토링 제도가 효과를 본다 하고, 대학생들은 특강 온 성공한 선배들을 멘토로 삼아 취직에 도움을 받고자 한다. 이거야 원, 이래서야 지연, 학연, 혈연으로 밀고 끌어주던 한국식 미풍양속의 변종일 뿐이잖은가.

멘토라고 부른 적도 생각한 적도 없지만 내게는 믿을 만한 의논 상대가 있다. 내가 걱정하면 토닥여주고 울면 섣부른 위로 대신 침묵해주는, 선배, 스승 …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 뾰족한 대안을 제시받거나 썩지 않은 튼튼한 동아줄을 공급받아서 그를 찾는 게 아니다.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늘 구체적이고 가혹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근화의 시 <유리문 안에서>를 읽다 우는 얼굴로 웃은 건 그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은 울었고/ 남자들은 화를 냈다/ 모든 것이 너무 가깝거나 멀었지만/ 사람들은 둘 이상의 질문을 동시에 했다/ 소세키는 대답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 속 소세키는 일본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를 뜻하고 시의 제목은 그의 산문집 제목에서 따 왔다. 소세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유리문이 있었다면 그에게는 없느니만 못한 핸드폰이 있으므로 사람들은 날마다 그의 핸드폰에 전화를 건다. 그의 핸드폰은 진동을 하며 자주 아플 것이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그는 누구에게 가서 울거나 화를 낼까. 그에게도 화가 나는 일이 있고 생각이 안 풀리는 날이 있고 흠뻑 잠길 추억이 있는데. 우리 앞에서 그러지 않는다면 그는 누구에게 가서? 따뜻한 정종 마시기 좋은 찬바람이 멀리서 불어오니, 나의 소세키 님을 모시고 그의 추억을 들어보아야겠다. 이 시는 “여자들이 죽었다/ 남자들도 죽었다/ 소세키도 지금은 그 자리에 없다”로 끝나지만, 그는 지금 그 자리에 있으므로.

이다혜 좌충우돌 독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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