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9.17 19:01
수정 : 2008.09.19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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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프로젝트의 벼룩시장에 판매자로 참가한 이화정 기자. 벼룩시장에서 판매되는 것은 물건뿐이 아니라 인간적 유대감까지 포함한다. 이화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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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세계 각국 벼룩시장의 VIP 고객인 여기자가 거꾸로 물건을 팔아보았더니
얼마 전 벼룩시장 판매자로 ‘데일리 프로젝트’에서 개최하는 벼룩시장에 참여했다. 계기는 최근 들른 일련의 벼룩시장에서 비롯되었다. 물건을 좀 깎아 달라 하자, “저 이거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5유로 주고 산 거예요”라며 못을 박아 버리는가 하면, 정가 1000원짜리 장난감을 2만8000원에 버젓이 파는 곳도 있었다.
이 정도면 ‘여행 중 들러야 할 곳 1위’로 주저없이 벼룩시장을 꼽는 ‘벼룩시장 브이아이피(VIP) 고객’인 내가 세계 어느 벼룩시장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당혹스러움이다. 순간, “내고 싶은 만큼 내고 가져가라”던 경제관념 제로의 베를린 벼룩시장 아저씨가, 실수로 원래 가격보다 훨씬 싸게 말했음에도 그 가격을 고수하던 도쿄 벼룩시장 청년이, 한참 동안 흥정을 주고받던 바르샤바 벼룩시장의 할아버지가 뇌리를 스쳤다. 내가 쓰지 않는 물건이지만, 누군가는 필요로 하는 상품을 내다파는 곳. 일종의 리사이클링 개념까지 포함된 이 숭고한 ‘시장’이 유독 한국에서만 흐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내심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래, 내가 벼룩시장 판매자가 무언지 보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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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좌판의 판매자는 다른 좌판의 구매자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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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기대 안했던 물품이 더 잘 팔려
판매자가 되는 절차는 의외로 간단했다. 주최 쪽에 메일로 참가의사를 알리자, 즉각 ‘모월 모일 모시까지 오십시오. 참가비는 만원입니다’라는 회신이 돌아왔다. 정작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참가를 며칠 앞두고 팔 물건을 정리하는데 그때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좀 팔기 아까운데, 이걸 팔아야만 할까’ 하는 아쉬움에 물건들을 가방에 넣고 빼기를 너덧 번. 거기다 ‘과연 이런 물건을 누가 사기나 할까’라는 일종의 회의적인 꼬리표가 끊임없이 판매자인 나를 옥죄어 왔다. 이미 주변에 소문을 내놓은 터라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막상 작정을 하고 정리해 보니 팔아야 할 물건이 여행용 슈트케이스가 터져 나갈 정도로 만만치 않은 분량이다.
판매자는 대개 개장 한 시간 전부터 자리를 잡고 팔 물건들을 정리한다. 테이블과 의자를 빌려 준비해 간 천과 옷걸이, 돗자리 등의 기물을 활용해 정성껏 디스플레이를 했다. 비록 중고 물건이지만 상품 가치를 최대화하는 게 그날 매상을 결정지을 관건이다. 액세서리며 인테리어 소품, 장난감, 옷가지까지 정성껏 늘어놓고 나자, 제법 ‘숍’의 모양새가 드러난다. 내가 직접 고른 물건들, 한때 애정을 갖고 사용한 물건들인지라 상품 하나하나가 내놓은 자식처럼 뿌듯해 보인다. 첫 손님은 엄마 아빠와 함께 들른 중학생 소녀. 존 버닝햄 전시를 보고 구입한 핸드폰 고리를 한눈에 알아보고, “이게 여기 있었네!” 하며 덥석 값을 치른다. 개시가 좋았던지 오후가 되자, 눈코 뜰 새 없이 손님들이 밀려들었다. 신기하게도 내놓자마자 팔릴 거라 예상했던 품목 대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물건이 더 반응이 뜨겁다.
고객들의 양상도 다양하기 그지없다. “저 이거 두 개 사는데 싸게 안 돼요?”라는 애교파부터, “돈이 이거밖에 없어. 더는 못 내”라며 물건을 뺏어가는 막무가내파, “아까 사 가고 다시 들렀으니 싸게 해줘요”라는 인정호소파까지. 게다가 어린 학생부터 아줌마, 청년, 아저씨 등 연령과 성별도 다양하다. 비록 구매까지 이어지지 않았지만, ‘천데렐라’ 이천희까지 손님으로 등장했다. 내가 내놓은 영플레이 모빌을 들고 가격을 묻더니 잠깐 고민을 한다. ‘좀더 깎아 줄걸 그랬나?’ 꼼꼼히 물건을 살피고, 물건의 구입처나 사연을 물어보고 가격을 흥정하는 데에선 어느 누구나 차이가 없다. (배스킨 라빈스의 ‘골라 먹는 재미’는 고작 서른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지만, 벼룩시장에서 보물을 건질 확률은 인내심 대비 무궁무진이니 이런 과정은 참가자로서 반드시 숙지할 수칙이다.)
인간의 마음이 간사한지라, 막상 판매자가 되고 보니 좀더 비싸게 팔아보겠다는 욕심이 작용한 순간도 있었음을 실토한다. 그러나 일일 판매자로 겪은 벼룩시장은 호기심 어린 구매자로 참여했던 이전의 벼룩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판매자인 나 역시 내 좌판이 아닌 옆 좌판을 틈틈이 기웃거리며, ‘이따가 사겠다’고 점찍어 둔 또다른 구매자였으며, 구매를 하려는 사람만큼이나 스스로 내놓은 물건에 애정을 아끼지 않는 ‘중고 물품 애호가’ 중 한 사람이었다.
시장원리쯤은 잊고 즐겁고 유쾌하게!
결국 이곳에서 통용되는 것은 물건 자체가 아닌 물건을 빌미로 한, 일종의 인간적인 ‘유대’일지 모른다. 무진장 더워 얼굴이 익을 지경이거나, 바람이 세차게 불어 연방 모래가 눈으로 들어온다거나, 빗발이 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누군가 사용했던 제품을 열심히 골라낸 이들, 그리고 그 고통을 함께 공유하는 판매자들. 그들은 이 ‘쉽지 않은 거래’를 통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흠집을 가진 물건과 아주 오랫동안 돈독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니까 “이건 언제 어딜 가서 어떤 인연으로 어떤 절차를 거쳐서 구입했다”라는 역사를 늘어놓을 수 있는 감성적인 장소만으로도 이곳의 기능은 대략 유효한 셈이다. 하루 동안 그 ‘추억’을 생산한 판매자로서 다음 판매자를 위해 조언을 한다면, 그런 관계를 맺는 소박한 의식에서만큼은 시장 원리쯤 잊고 즐겁고 유쾌해도 좋다는 것!
이화정/<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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