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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르고 멋진 시어머니가 될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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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한때 시댁 부엌 뒷문을 잡고 울었으나 지금은 명절을 휴가로 여기는 싱글맘 이야기
솔직히 싱글맘이 된 이후에 가장 변한 것 중의 하나가 명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나는 명절이 다가오면 전에 없던 버릇을 하나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음이 설렌다는 것이다. 그것도 많이!
어른들이 잘해 주어도 고역이었다
소위 프리랜서 군에 속하는 직업을 가졌으니 누가 나에게 휴가를 줄 리도 없고 내가 받을 생각도 하지 않지만 명절이야말로 내게 주어지는 진짜 휴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첫째 누구도 원고 독촉을 하지 않고, 둘째 누구도 전화나 메일로 강연이나 원고를 청탁하지 않는, 나로서는 정말로 외부의 소음이 모두 잦아드는 진정한 휴가 때다. 이번 연휴는 짧아서 조금 아쉽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렇게 명절이 되면 원래는 아이들에게 물어 외국여행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대개는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잔뜩 쌓아놓고 뒹굴방굴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는다. 아니면 그동안 남들이 좋다고 하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영화를 실컷 감상할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내가 변한 것인지 세상이 변한 것인지, 한 십 년 전만 해도 혼자 사는 친구가 명절이면 쓸쓸할 거 같아 불러다 저녁을 먹이며, ‘난 이런 명절에 혼자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생각한 기억도 난다. 아니 그리고 더 비교되는 기억이 있다. 내가 소위 며느리였던 시절의 명절 말이다.
스물셋에 처음 명절을 쇠러 시댁에 내려갔다가, 나는 정말로 부엌 뒷문을 잡고 울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조금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때 나의 시댁이 무슨 경북의 명문가여서 내게 손수 방울방울 제주(祭酒)를 내리고 두부를 누르라고 중노동을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맏며느리에 시누와 시동생 줄줄이 달린 처지라서 그들을 혼자서 몇 날 며칠 해 먹이느라 그런 것도 아니었다. 우리 시댁은 대개 내게 아주 친절하셨고, 그리고 동등하게 대해주셨다. 다만, 이 명절이란 것이 되자, 여자들은 부엌으로 남자들은 방으로 마치 일소대 이소대 갈라지듯이 갈라지더라는 것이 내게는 충격이었다. 성(性)이라는 게 이토록 유별하고 또 계급적일 수가 있구나 하고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인 것 같다. 그에 비하면 그 이전에 내가 배웠던 모든 이론은 문자 그대로 회색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시댁의 남자 어른들이 나를 부려먹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 그분들은 어린 새댁인 내가 부엌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보고는 어리지 않은 내 시어머니나 동서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거 막내아기가 들기가 무거울 텐데 … 이런 건 당신이 좀 하지.” “거 제수씨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 이건 당신이 좀 해.” “제수씨도 어서 드세요. 근데 여기 초간장이 없네 ….” “아가야 넌 뭐 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먹지를 않니? 어서 먹거라 … 근데 여기 얘 (자신의 아들, 즉 그때 나의 남편)가 국이 맛있나 보다. 벌써 다 비웠네.” 그리하여 긴 명절을 즐기느라 민속놀이(신문에서 고도리라고 해도 되나?)를 하거나 즐거운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는 동안 나는 부엌에서 나 대신 무거운 것을 드는 시어머니와 동서에게 어려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 있어야 하거나 간장종지와 국그릇을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다.(우리나라 음식들이 찍어 먹는 소스가 간장 초간장 와사비간장 겨자간장 초고추장 볶은고추장 된장 쌈장 마요네즈 케첩 등등 세분화 되어 있다는 이 선진적인 사실이 그때처럼 저주스러운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 그릇들을 다 씻어야 하는 일이란 …)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다 마친 후면 시어머니와 동서들은 맛있는 것을 다시 잔뜩 만들어서는 내게 주며 말하는 것이었다. “에궁, 밥 먹은 지가 꽤 되어서 출출들 하실 텐데 어서 이것 좀 갖다드려.” 세 며느리에게 돌아가며 안식년을 솔직히 설거지 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뛴 내가 출출하면 했지,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민속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 뭐가 그리 바빠서 출출해한다고 내가 그들에게 코앞까지 먹거리를 날라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아직도 알 수 없으며, 내 딸이 이담에 시집가서 그런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쓰릴 거 같다. 왕복 스무 시간 정도 되도록 밀리는 길을 어린아이들 데리고 내려가야 하는 것은 내 선택이었다고 쳐도 말이다. 내 후배 하나는 일년 내내 휴가 한번 갈 수 없이 바쁜 직장생활을 하는데 명절이 다가오기만 하면 문자를 보내온다. “언니, 나 터키로 떠나! 다녀와서 봐용!” 네 시댁은 뭐 하니, 하고 내가 물으니 후배는 말한다. 시어머니가 게으르셔서(이건 어디까지나 후배의 말이니 언론 중재위원회에 제소하시지 말기 바란다) 음식을 하는 것도 누가 집에 오는 것도 귀찮아하시므로, 일단 명절 전의 좋은 주말에 온 가족이 다 외부의 음식점에 모여 조상님을 위해 기도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돈은 각자 낸단다), 그러고 안부를 묻고 헤어진단다. 그러니 후배는 명절마다 외국여행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는 말하는 것이다. “시댁의 이런 재미에 내가 우리 남편 못마땅해도 참고(이것도 순전히 후배의 말이다) 살아주는 거야.” 나 역시 아들이 둘이지만, 게으른 시어머니가 될 확률이 거의 백이 퍼센트이므로 이 시어머니는 나의 멘토가 되실 듯하다. 그런데 돌아보면 우리 주변에 이런 멋진 분이 이분 한 분은 아니다. 내 친구는 새로 시집을 갔는데(새로! 라는 단어에 주목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시어머님 또한 이렇게 게으르고 멋진 분이었다. 그분은 남편의(그러니까 내 친구의 시아버지) 제사조차도 그날이 아니라 그 전의 어떤 주말에 형제들이 모두 좋다는 날을 받아 지내신다. 며느리들이 맞벌이를 하는 것을 안쓰러워하시는 마음도 물론 있다. 이분의 말을 들어보자. “아니, 애들이 다 먹고살기 힘들어 그리 애써 일하는데 아버지 제삿날이 크리스마스도 아니고 , 중요한 일 없으리라는 법이 없잖아. 게다가 그날 일이 바쁘면 오는 데 맘이 뭐가 편하겠어? 산 사람 생일도 일이 바쁘면 그 전에 좋은 날 받아 당겨 하는 것이 흉이 아닌데, 죽은 사람 제사 좋은 날 받아 맘 편히 모여서 밥 한 끼 먹는 게 뭐가 어때서 그래?” 그리고 또 내 친구의 집은 며느리가 셋인데 일 년마다 돌아가며 안식년을 준다. 딸만 있는 처가를 배려한 것이다. 그렇게 멋진 시아버지가 계시냐고 내가 묻자, 그 집의 아들인 내 남자친구는 볼멘소리로 대꾸한다. “불쌍한 우리 어머니는 칠십이 넘도록 안식년 한번 못 받으셨어.” 고속도로변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 이번 연휴 동안 인터넷을 보니 ‘10월과 3월에 이혼율 치솟아’라는 제목이 있다. 설마, 하는 맘으로 기사를 클릭해 보니 9월 말이 추석이고 2월 말이 설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조상님들은 과연 이런 제사상을 받고 싶을까? 나는 이담에 죽어서 아들 손자 며느리들이 가정이 깨지도록 서로 다투며 와서 차려주는 음식이 먹고 싶을까? 아직 죽어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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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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