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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17 21:48 수정 : 2008.09.19 14:51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매거진 esc]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토끼 간에서 버섯 찌꺼기까지 별별 게 다 들어갔다네
오래묵힌 된장찌개와 닮은 이탈리아판 장맛의 비밀

마을이 온통 술렁거렸다. 수군거리는 소리는 이내 킥킥, 하는 웃음으로 번졌다. 뭐야? 뭔데 그래? 부주방장 페페가 내 손을 이끌고 구석진 자리로 끌고 갔다. “킥. 지금 마을이 난리야. 시칠리아 여자가 나오는 영화 때문이지.” 아하, 그것 때문이군. 출근길에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봤다. 언뜻 여자의 누드 실루엣 같았는데, 여자가 벗고 나오는 영화가 뭐 특별히 대단한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포르노를 모독한 옆동네 ‘늑대여인’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읍장 딸내미가 벗고라도 나온다는 거야 뭐야.” “바로 그거야. 읍장 딸은 아니지만 시칠리아 여자라고.” 시칠리아 출신의 비(B)급 배우가 나오는 그렇고 그런 비급 성애영화였다. 문제는 여자가 바로 옆 동네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남자들이 흥분하기 시작했고, 마을에 단 하나뿐인 극장이 후끈 달아올랐던 것이다.

그렇지만 점잖은 체면에 남들 눈치도 봐야 하는 시골 사람들이 댓바람부터 극장에 진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사정을 뻔히 아는 극장주는 과감히 주말 심야상영을 걸었다. 인구 3만의 시골 마을에서 심야상영이라니. 노인들은 혀를 쯧쯧 찼다. ‘네 딸년이 벗고 나온다고 생각해봐. 극장으로 발길이 떨어지나’ 노여워했지만, 밤이 깊어 적당히 프라이버시를 지킬 분위기가 되자 극장 앞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페페와 잔니, 우리 주방의 남자들도 마지막 디저트 주문을 처리하자마자 50㏄짜리 베스파 딸딸이를 타고 ‘치네마’(Cinema), 그러니까 극장으로 총출동했다. 평소 같으면 요란한 이탤리언 허그로 껴안고 입맞추고 난리가 날 사람들이 그날 밤만큼은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했다. 프란체스코, 니콜로, 마르코, 루카 … 오직 마을 남자들만의 은밀한 오락은 침을 꼴깍 삼키는 기대감으로 더욱 개봉박두의 심야로 달려가고 있었던 거다. 침 삼키는 소리를 은폐하려는 고의적인 헛기침과 노골적인 휘파람이 공존하는 영화 도입부의 시간이 흐르자, 언제 시칠리아 여자가 벗고 나오는지 다들 기대감으로 들떴다.

영화는 정말 한심했다. ‘늑대여인’이라는 제목대로 여자가 밤만 되면 늑대로 변해서 치솟는 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남자를 사냥한다는 줄거리였다. 페페와 잔니는 일면식도 없지만 ‘옆 동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영화에 넋을 빼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늘었다. 어쨌거나 시칠리아 여자, 옆 동네 여자가 나온다고 한들 영화가 재미있어야 사람을 붙들어둘 텐데 말이다. 괜히 쓰잘 데 없이 클로즈업을 남발하면서 젖가슴을 화면 가득 채우는 만행도 서슴지 않는 연출력도 형편없었지만, 가짜 털을 대충 숭숭 붙인 늑대 여인의 누드가 섹시하기나 하냔 말이다.


기대의 휘파람은 야유의 휘파람으로 바뀌었다. 페페와 잔니도 대충 자리를 떠서 늦은 피자 한 판씩 때리고 맥주나 마시려는 눈치였다. 피자가게 ‘라 콘테아’에는 이미 극장에서 보았던 남정네들이 어느새 기어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페페의 친동생 엔리코가 날라다주는 생맥주 맛은 기가 막혔다. 후일담이지만 이들 형제는 최근 직접 식당을 차렸다. 이름도 유치한 ‘포모도로’(토마토). 한국으로 치면 무슨 ‘배추나 무’라거나 ‘열무’라고 한식당 이름을 붙인 식이다. 어쨌든 파리를 잔뜩 날리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달기에 벌이 날아와서 빨아먹을까

피자를 먹고 돌아가는 길에 영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포스터에 적혀진 ‘포르노그라피코 레알레’(Pornografico Reale! 진짜 포르노 필름)라는 홍보 문구 옆에 누군가 스프레이 페인트로 야유를 날려 놓았다. “세 에 포르노, 친퀘첸토 에 페라리”(SE E’ PORNO, 500 E’ FERARI!!! 이게 포르노면 친퀘첸토(소형국민차)가 페라리다)

토마토가 발갛게 잘 익으면 이탈리아 농가에서는 토마토소스를 끓인다. 이걸 병조림하거나 냉장해 두고 일년 내내 먹곤 한다. 장 담그는 가정이 거의 없어졌듯, 이탈리아도 토마토소스를 직접 만드는 경우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깡통에 든 소스를 열어 몇 가지 가정식 가미를 할 뿐이다.

주방장 주세페는 여전히 토마토소스를 끓이는 몇 안 되는 주방장이었다. 토마토가 잼처럼 농밀하게 익는 6월이면 주세페는 차를 끌고 시골 농장으로 갔다. 뜨거운 시칠리아 태양을 받아 단내를 푹푹 풍기며 익은 토마토를 상자째 사서 돌아온다. 한국에서 요리사 생활을 하며 종종 받는 질문 중에 “왜 생토마토를 사서 소스를 끓이면 맛이 없나요”가 있다. 그럴 수밖에. 터질 듯이 농익을 때까지 기다려서는 토마토가 운송 중에 다 망가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건조한 날씨인데다가 토마토 품질을 많이 따지기 때문에 한결 낫지만 푸른 토마토를 따는 건 비슷한 사정이다. 캄파냐, 시칠리아 같은 토마토 산지에서 이탈리아 전국으로 떠나면서 천천히 트럭 안에서 익어간다. 그래서 주세페는 아는 농장 주인에게 직접 토마토를 샀다.

“진짜 요리사가 되려면 시장과 들판을 알아야 해. 오징어와 농어가 언제 올라오는지, 토마토가 가장 잘 익는 때가 언제인지 알아야 하지. 식당에 앉아 손가락만 써서는 절대 좋은 재료를 구할 수 없다고. 좋은 재료는 요리의 전부야.”


박찬일 요리사와 고락을 함께했던 주세페 주방장(가운데) 모습. 주세페 바로네 제공
농장 주인은 벌이 날아와 즙을 빨아먹도록 토마토를 내버려뒀다. 토마토가 얼마나 달면 벌이 다 달려들겠는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좋은 토마토소스를 끓이려면 잔손이 많이 간다. 끓는 소금물에 토마토를 던져 넣어 껍질을 벗겨야 한다. 그걸 등을 따서 씨를 훑어내고 과육만 곱게 갈았다. “마늘은 절대 쓰면 안 된다. 마늘은 쓴맛을 낸다고. 붉은 양파 한 줌이면 돼.”

질 좋은 올리브유를 연기 나도록 데운 후 다진 양파를 썰어 넣었다. 치익, 양파가 익으면서 달큼한 냄새가 났다. 옛날, 엄마가 카레를 볶을 때 나던 냄새! 주세페는 양파가 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래야 진한 맛이 난다는 거다. 그리고는 토마토 과육 간 것을 넣었다. 올리브유가 과즙을 뚫고 커다란 냄비 표면으로 솟아올랐다. 진하고 고소하며 새콤한 냄새, 공장 토마토소스에선 맡을 수 없는 향기였다. 어렸을 때 메주 쑤던 냄새가 사라지고 공장 된장이 식탁을 점령하면서 우리 입이 망가졌듯이, 이탈리아도 가정식 토마토소스는 이별을 고하는 중이었다. “공장 토마토소스는 미국 케첩보다 나은 게 없어. 이름만 이탈리아제지. 그런 걸 만드는 골 빈 놈들부터 쥐어박아야 해.”

“연애와 소스는 천천히 해야 제맛이라고”

주세페는 좀 흥분했다. 정말 그놈들을 쥐어박을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다가 그가 “맘마미아!” 소리를 지르더니 두 손바닥을 마주 붙였다. 그러고는 앞뒤로 흔들었다. 한-일 월드컵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토티가 퇴장 명령을 받고 주심에게 흔들던 그 제스처가 딱 그거였다. 그새 토마토소스는 더 맹렬하게 탄 냄새를 피워올렸다. 일단 불부터 줄이고 보시라고요, 주방장님!

토마토소스는 아주 낮은 불로 뭉근하게 오래 끓여야 한다. 오래 끓일수록 맛이 좋아진다. 토마토의 독성, 신맛, 쓴맛이 다 빠져나가야 한다. 토마토소스가 다 끓으면 다시 이걸로 라구를 끓인다. 불어나 이태리어나 똑같이 ‘라구’라고 부르는 이 토마토 미트소스는 식당과 가정의 숨겨진 장맛 같은 거여서 나름 비결들이 많다. 그래 봐야 닭이나 오리 간, 돼지 피, 소 수구레, 소 등골, 말린 버섯 찌꺼기 따위의 잡동사니가 대부분이다. 거무튀튀하되, 그 구수하고 침을 흘리게 하는 진짜 미트소스는 그야말로 아수라로 이루어진다는 걸 알았다. 손님상에 점잖게 올라가서 ‘시칠리언 라구소스의 탈라이탈레’라고 이름 붙이고 15유로씩이나 받아먹는 그 소스의 정체는 그랬다.

“일종의 카오스지. 세상에 버릴 건 없어. 폰도브루노(송아지뼈소스. 프랑스의 퐁드뷔를 말함)나 라구나 온갖 잡것이 들어가야 제맛이지. 세상에 버릴 건 없어.”

정말 벗겨낸 양파껍질, 서양배추 꽁다리나 아스파라거스 껍질, 감자껍질, 토끼의 간과 발목이 모두 소스에 들어갔다. 마치 오래 묵힌 된장찌개가 풍기는 그 진한 풍미를 닮은 라구 소스의 맛은 그렇게 완성되어 갔다. 내가 딴 짓을 하느라 소스 끓이는 불을 낮추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로베르토오! 당장 소스 불 줄이지 못해? 연애랑 소스는 천천히 해야 제맛이라고.”

박찬일 이탈리아 레스토랑 ‘논나’ 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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