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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싱글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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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도훈의 싱글라이프
홍대를 걷는데 누가 물었다. “스트리트 패션잡지에서 나왔는데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스트리트 패션잡지에 사진이 올라간다고? 두고두고 잡지계의 놀림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지금 근무하는 잡지에서는 한 이년 정도 우스갯거리가 될 게 틀림없다.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하고 돌아서면서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스트리트 패션잡지라면 대개 피부 탱글탱글한 십대와 이십대 청춘의 사진만 골라서 찍기 마련이다. 일요일 저녁 의기소침한 기분을 안고 막창구이집으로 향하는 서른세살 남자의 패션이 드디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는구나. 씨익 웃었다.
당시 입고 있던 옷은 이랬다. 몸에 딱 붙는 네이비색 빈티지 더블버튼 재킷. 목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살짝 파인 하얀색 면티. 살짝 발목 위까지 걷어올린 회색 치노팬츠. 이틀을 고민하다가 30여만원을 냅다 투자해서 구입한 프랑스제 검은 뿔테 안경. 검은색 컨버스 천 스니커즈. 그리고 프랑스에서 영국 신문 가디언을 사고 사은품으로 받은 에코백. 쇼윈도를 지나가면서 슬쩍 내 모습을 훔쳐봤다. 나이보다 다섯 살이 뭔가. 여섯 살은 어려 보였다.(알다시피 서른이 넘어가면 한 살 차이가 광년의 차이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씨익 웃었다.
귀가해서는 서점에서 구입한 잡지들을 쇼핑백에서 하나하나 꺼냈다. 일본 잡지 몇 권과 여성 패션지 한 권이 나왔다. 여성 패션지를 구입한 건 부록 때문이었다. 6800원짜리 잡지의 부록이 외국 출장 때 어머니 선물로 구입하곤 했던 갈색 병의 영양크림이라기에 구입한 터였다. 겨우 7㎖짜리 샘플이다. 하지만 공짜 아닌가. 게다가 잔주름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걸로 중년 부인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자자한 제품이다. 만날 어머님께 바치기만 했으니 나도 한번 써보자 싶었다. 마침 올해 생겨난 입가의 주름이 내내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화장실로 향했다. 갈색 병을 열어 진득한 크림을 손가락에 부어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가 젊음을 위해 처바르던 처녀의 피가 이렇게 향기로웠으랴. 얼굴에 바르는 순간 젊음의 아우라가 퀴퀴한 화장실에 충만해 오는 듯했다.
갈색 병의 마법에 대한 염원이 부질없어진 건 그날 새벽이었다. 이십대 시절의 피부 세포가 땀구멍 밑 어딘가에서 솟아나길 기대하며 인터넷을 켜고 오랜만에 대학 친구의 싸이월드에 들어갔다. 낼모레면 유치원에 들어갈 아들을 안고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아저씨의 얼굴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평소의 나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게다. 저렇게 볼품없는 오버사이즈 셔츠를 저렇게나 밑위가 긴 바지 속에 넣어 입다니 정말 아저씨가 다 된 거야? 혹은 이렇게 생각했을 게다. 벌써부터 저렇게 자글자글한 눈가 주름이라니 아이크림을 바르는 거야 마는 거야? 그날 새벽은 달랐다. 환하게 웃고 있는 친구 얼굴이 아저씨의 얼굴이 아니라 어른의 얼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입가에 새로 생긴 주름을 없애줄 영양크림이나 여섯 살쯤 어려 보이게 만들어 줄 슬림한 더블버튼 재킷이 아닐 것이다. 정말로 중요한 건 자신의 젊음이 아니라 아들의 젊음일 것이다. 아들의 젊음을 위해 넣어둔 펀드 통장의 안정적인 숫자들일 것이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대학 친구의 사진을 보며 삐딱하게 비웃지 않았다. 그리고 노화방지용 액체가 질펀하게 발린 얼굴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지금 한국의 삼십대 독신 남자들은 우아하고 젊은 싱글을 넘어서서 동안 콤플렉스와 나르시시즘으로 가득한 도리안 그레이로 진화하고 있는 걸까. 거울을 들여다봤다. 자기애라는 버릇에 도취된 서른세 살 아저씨가 보였다. 어른은 아니었다.
김도훈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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