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01 17:41
수정 : 2008.10.0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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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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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이다혜의 한 줄로 한 권 읽기
<좀비의 시간>
이경석 글·그림, 팝툰 펴냄
“웃긴 얘기지만 좀비에 물리고 나서 더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지난해
에 연재됐다가 최근 단행본으로 발간된 <좀비의 시간>에서 좀비라는 상태는 에이즈랑 비슷한 데가 있다. 잠복기를 거친 뒤 발병하면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좀비에게 물린 준수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불치병 환자보다도 못한 상황에 처한 셈이다. 세상은 그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대신 그를 죽이려 들기 때문이다. 문제는 좀비에 물린 직후 준수의 삶이 급속도로 활기차졌다는 데 있다. 원래 준수는 “꽃이 피고 지는지 관심 없고, 담배 피는 고삐리 무섭고 전혀 관심 없”는 상태였는데, 이제 준수는 “떨어진 꽃잎만 봐도 눈물이 난다, 담배 피는 고삐리 이젠 무섭지 않다”.
인생 사는 맛을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뒤에야 알게 된다는 이야기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좀비의 시간>이 흥미롭다면, 그런 각성과 감동의 전철을 평범하게 밟아 가지 않기 때문이다. 준수가 좀비가 된 뒤 준수의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부터 준수를 괴롭히던 동창, 처음 만나는 여자와 그녀의 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척을 지더라도 준수를 돕거나 준수와 함께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게 다 각자의 이기심의 발로다. 어려서부터 준수의 머리를 자주 때렸던 친구는 자기 때문에 준수의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죄책감을 느끼고, 결혼을 했으나 딸과 함께 버림받은 여자는 다시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준수 곁을 지킨다. 꼭 인생 막장까지 가야 살고 싶고 열심히 하고 싶어지는 걸까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딱하기 그지없지만 이게 꼭 준수와 준수를 둘러싼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판에 박힌 일상이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것 같다는 암울함에 짓눌릴 때는 매사에 시들하지만 갑자기 직장이 없어질 것 같다거나 소중한 사람이 떠난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없던 정도 생겨나기 마련. 물고 빨고 어르고 달래기엔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안 그러면 내가 후회할 것 같아서. 그래서 오늘의 교훈. 인생 망가지기 전에 열심히 살고, 소중한 사람한테는 있을 때 잘하자. 어른들 말씀 틀린 거 없다는 건 이런 때 쓰는 말이다.
이다혜 좌충우돌 독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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