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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0.01 20:02 수정 : 2008.10.04 14:01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매거진 esc]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시칠리아 시골 식당을 뒤집은 음식기자 출현 소동
‘별’에 목마른 서구 요리사들, 간장과 된장을 탐하네

주방장 주세페가 식지를 세워 입술에 붙였다. 인류 공통의 보디랭귀지, ‘쉿!’이다.

“무슨 일이야?” 주방 식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주세페는 말없이 전표를 가리켰다. 전표의 주문은 달랑 1인분이었다. 주방 창문을 통해 홀을 내다봤다. 홀에 혼자 앉아 엄숙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젊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지오르날리스타!”(giornalista) 부주방장 뻬뻬가 소리를 질렀다. 주세페가 두 손바닥을 맞세우고 코앞에 붙인 후 연방 흔들었다. ‘제발 좀 조용히 해’라는 뜻이다.

게으른 요리사가 고집스런 장인으로 둔갑

<감베로 로소>(이탈리아의 권위있는 식당 안내서)? <미슐랭 가이드>? 어디서 온 걸까. 이탈리아에서만 식당 비평을 하는 매체나 기관이 십수 곳이다. 음식 권위자들이 적어도 두 번은 몰래 방문해서 살짝 맛을 보고 간 후 냉정하게 평가해서 등급을 매긴다, 고 착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그러니 암행감사(?) 같은 건 드물다. 워낙 깡촌인데다 ‘모두가 형제’인 이탈리아에서 비밀리에 뭘 시험한다는 건 생리에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전화 한 통화면 알 수 있는 음식 가격도 틀리고, 주 메뉴도 3년 전 것이 버젓이 기록되어 있는 거다. 하긴, 이런 일이 이탈리아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최근에 미국의 유명 음식, 와인 전문 잡지가 큰 망신을 당했다. 한 음식평론가가 있지도 않은 가공 식당의 방문기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더니 그 잡지에서 직접 가본 양 버젓이 소개 기사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 소개 기사가 얼마나 낯 뜨거웠을까 상상해 보시라. ‘친절하게 웃는 서비스가 인상적이며, 유명 화가의 그림이 걸려 있는 홀은 압도적 … 음식은 창의성이 넘치며 마치 마티스가 접시 위에 재림한 것처럼 폭발적인 에너지가 넘친다…’

흑,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군. 이뿐만이 아니다. 수준 낮은 기자들이 음식평론가 행세를 해서 웃기는 일도 생긴다. 시장에서 사온 훈제 상어를 놓고 ‘아아, 이런 훈제 조리법은 그야말로 유니크하다’고 읊어대거나, 초짜가 잘못 담아서 엉성해진 접시를 두곤 이렇게 읊조렸다. “일부러 투박하게 담은 파스타 접시는 소박한 시칠리아 시골 식당의 영혼이 느껴진다…”

이뿐이랴. 싱거우면 ‘건강요리’고, 짜면 ‘토속요리’다. 고기가 질기면 ‘싱싱’한 거고, 오래된 고기는 ‘잘 숙성된’ 거다. 장식이 별로 없고 양념이 약하면 ‘재료 본래의 맛을 강조’한 거고, 그 반대면 ‘재료 본래의 성격을 확 바꿔 버리는 창의성’이 있는 거다. 맛이 없으면 ‘서비스가 좋아서 음식 맛 따윈 잊게 만든다’고 하고, 서비스가 개판이면 ‘그래도 음식 맛은 좋다’다. 비싼 수입 식자재를 가져다 쓰면 ‘어렵게 수배하여 공수한 재료’가 있는 거고, 대충 동네에서 나는 재료만 가지고 만들면 ‘재료의 현지화와 로컬푸드 실현’이다. 10년이 지나도 메뉴판이 바뀌지 않는 게으른 요리사도 ‘십년 세월을 한결같이 지키는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이 되는 게 이 바닥의 식당비평이다.


진지한 손님 앞에서 주방 전체가 ‘쉿!’

각설하고, 식당에 앉아 있는 그 의문의 인물은 누가 봐도 기자처럼 행세했다.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조용히 혼자 앉아서 뭔가를 끼적거리며 식사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주방은 바짝 긴장했다. 그는 심지어 다른 계절의 음식 가격대는 어떻게 되는지, 바캉스 시즌에 두어 달쯤 문을 닫는지 등등 꼬치꼬치 물어댔다. 주세페는 이마에 땀을 잔뜩 흘리며 그의 대답에 촌스러운 사투리로 대답했다. 그는 눈치가 있는 양반이었다. 시칠리아 식당이면 시칠리아답게 사투리도 좀 날려주고 그래야 ‘토속적인 분위기 물씬…’ 하는 기사가 나갈 거라는 걸 그는 알고 있는 거다.

“바캉스에도 저희는 쉬지 않습니다요, 손님! 음식은 맘에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 손님! …손님! …손님!” 주세페는 파스타가 혹시 덜 익거나 더 익었는지 접시가 나가기 전 일일이 먹어봤다. 그러면서 양미간을 찌푸렸다. ‘너희들, 이따위 음식이 나가서 기자가 별을 안 주면 다 죽을 줄 알아’ 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뇨키(작은 감자떡)의 개수도 세어보고, 토끼 허릿살의 옆구리가 터져 속이 삐져나오지 않는지 꼼꼼히 점검했다. 수라상이 나가기 전 대령숙수(조선 왕실에서 음식을 담당하던 요리사)처럼 굴었다. 뭐, 그래 봐야 시칠리아 시골 식당의 소박한 음식이었을 뿐인데, 주세페는 뭔가 크게 오버하고 있는 거였다.


주세페 주방장(왼쪽)은 한국의 발효음식에 호기심을 보였다. 주세페 바로네 제공.
우리는 잠시 그 ‘기자’와 ‘별’을 잊고 일했다. 새로운 손님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주방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주세페가 등장했다. 다들, 잊고 있던 기자를 떠올렸다. 과연 별을 줄 것인가? 주세페의 표정을 살폈다.

“뭐? 아하 … 그 친구. 기자 아니라네. 다음달 결혼피로연을 예약할까 미리 구경하러 들렀다는군.” 주세페는 자신이 요란을 떤 것이 무안했던 거다. 마치, 두어 주 전에 팔레르모에서 복덕방 하는 사촌이 방문했던 일을 복기하듯, 일부러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주방 식구들은 고장 난 찜통처럼 김이 팍 샜다.

‘파토리아 델레 토리’라는 긴 이름의 우리 식당은 <미슐랭 가이드> 이탈리아판과 이탈리아 최고 권위의 <감베로 로쏘>에서 대충 별 하나 저 밑의 등급인 포크 한두 개는 받는다. 오해는 마시라. 그나마 이 포크 한두 개 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포크 하나만 달아도 ‘아주 괜찮은 식당이며 맛이 좋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식당 평가는 단순히 음식 맛만 가지고 별을 줬다 뺏었다 하진 않는다. 음식, 서비스, 와인, 인테리어 등 여러 항목을 나눠 검사한다. 창의성을 높게 보며, 재료의 특이성도 주요 항목이다. 그래서 재료의 분자적 해체와 조합을 통해 전혀 새로운 모양과 맛을 강조하는 분자요리가 나오고, 요리사들은 별을 받을 수 있다면 바다에서 고래 태반을 구해 오거나 자신의 허벅지라도 베어 구워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한국의 장 이야기로 주방장을 홀리다

우스운 얘기지만, 십수년 전에 별을 받았던 서양의 유명 셰프들 중 상당수가 동양적 재료에 눈을 벌겋게 뜨고 다녔다. 워낙 빤한 서양 재료를 넘어서려는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그래서 참깨와 참기름, 깃코만 간장, 미소된장이 등장했다(홍어 삭힌 건 어떨까). ‘창의성’을 만족시켜줄 최고의 재료였던 것이다. 그래서 한때 이들은 동양을 여행하며 영감을 얻곤 했다. 이런 동양 식재료에 서양의 고급 입맛들은 열광했다. 인도에서 넘어온 후추와 향신료가 서양 요리를 바꾸었고, 그 후계자는 극동의 양념이었던 거다. 이런 분위기 탓에 주세페는 ‘매일 간장과 된장 먹었던’ 내게 큰 호기심을 가졌다. 오오, 그 신비의 재료를 일상적으로 먹었던 이 사내는 누군가? 내가 엉터리 이탈리아어로 장 담그는 얘길 구수하게 된장처럼 풀면,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중하곤 했다. 특히 간장과 된장이 원래 한 식구였다는 사실에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어쨌든 주세페는 아직 별을 받지 못했다. 별 따윈 필요 없어, 라고 말하지만 그는 분명히 별을 받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별을 받은 그의 후배들(하나같이 내로라하는 유명 셰프다)에게 요리를 한 수 지도했다는 걸 내게 강조할 리는 없을 거다. 별을 가르치고 있으니 당신은 자연히 왕별인 걸까.

박찬일 이탈리아 레스토랑 ‘논나’ 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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