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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0.01 20:20 수정 : 2008.10.05 10:59

해발 720미터 통리재 정상에 위치한 철도. 노동효

[매거진 esc] 노동효의 아웃 오브 서울 ② - 강원도 통리재에서 사라진 길을 추억하다

‘여기에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평화’

우리가 그날 잠든 장소에는 분명 그렇게 씌어 있었다. 만약 그런 서각(書刻)이 새겨져 있지 않았더라면 빈집(?)을 무단 침입하여 하룻밤을 지낼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31번 국도를 따라 수라리재를 넘어 강원도 영월군 중동을 지나친 것은 해가 다 질 무렵이었다. 이제 샛길로 들어서 잠자리로 삼을 장소를 찾아야 할 시간. 옥동천 상류에 난 다리 하나를 건너자 산비탈 아래 민가가 몇 채 나타났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외길을 따라 꽁무니를 보이며 도망가는 수탉들과 음매음매 울어대는 소들과 짖어대는 개들뿐. 그나마 불청객으로 인한 한동안의 소란도 막다른 골목 끝, 폐교 운동장으로 들어서버리자 잠잠해졌다. 계세요? 학교건물과 학교에 딸린 가옥의 모든 문과 창문은 잠겨 있었다. 그렇다 해서 주인 없는 곳은 아닌 듯 운동장에는 하얀 조약돌이 깔려 있고, 화단에는 꽃이 피고, 곳곳에 세간들이 놓여 있었다. 그때만 해도 주인 없는 그곳에서 잠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쩌지 다른 장소를 찾아봐야 하나? 아, 그때 우리들의 고단함을 한방에 날려주던 문장 - 여기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평화.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불려지는 통리 협곡. 오른쪽으로 높이 50미터의 미인 폭포가 쏟아지고 있다.

폐교에서 보낸 하룻밤의 평화

우리는 주인의 배려대로 평화롭게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평화롭게 저녁밥을 짓고, 평화롭게 참치김치찌개를 끓인 후, 정말 평화롭게! 술판을 벌였다. 형광등 불빛 대신 세 개의 양초만이 어둠을 밝히는, 거룩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 고요한 밤이었다. 반주 몇 잔을 돌린 후 우리는 강원도 산골에서 평화롭게 잠들었다. 나도 그랬고 아마 L형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K만은 평화롭게 잠들 수 없었다, 한다. 잠든 사이 주인이 침낭을 들추고 “남의 마당에 자리 펴고 누워서 뭐 하는 짓들이야” 하고 노발대발할 것 같았다나. 법학을 전공한 K는 무단침입죄의 형량이 어쩌고저쩌고, 벌금이 어쩌고저쩌고 떠벌렸다. 그는 잠결에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여기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평화.

아무튼 이른 아침 우리는 수탉과 뻐꾸기 소리에 이은 뭇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격언을 새들도 서당개 삼 년의 개들처럼 어디서 배운 것일까? ‘수학능력 평가시험’ 대신 ‘비행능력 평가시험’이라도 있어서 아침부터 자율학습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짹짹 짹짹. 침낭을 걷고, 아침 식사를 하고, 폐교를 둘러보았다. 녹슨 미끄럼틀과 철봉, 독서하는 소년소녀상, 이승복 어린이상. 아니, 아직도 반공소년 이승복이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고 있었다니? 하긴 이미 죽었어야 할 국가보안법이 산 사람을 죽이려고 눈 부릅뜨는 세상이 돌아왔으니. 그러나 닫힌 교정에서 이승복 어린이가 무언의 외침을 지르는 것은 눈감아주자, 근데 열린 법정에서 유언의 외침을 질러대는 저들은 21세기를 20세기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안구이식수술을 받은 것일까? 생명공학의 발전 때문인지 갑작스레 이승복 어린이 복제인간들이 늘어난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우리는 김기덕 감독의 <빈집> 주인공처럼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400년 수령의 엄나무가 아래를 지나가는 낡은 자동차 한 대를 굽어보고 있었다.

강원도 산간 마을은 몇 년 사이에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차도가 왕복 2차로에서 4차로, 6차로로 넓혀졌고, 먹먹하게 만들던 탄광촌의 풍경도 지워져 가고 있었다. 초록빛으로 구부러지는 길들과 투명한 공기, 새로 지은 건물들. 도로 가의 이정표를 낯선 이국의 활자나 알파벳으로 바꾸면 유럽의 전원마을을 지나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나는 영국의 토트네스(자연주의 대안마을)를 떠올렸다. 토트네스로 간 사람들이 경험한 도시는 <아웃 오브 서울>을 실행한 한국인들의 얘기와 닮아 있었다. 미국 월가에서 연봉 100만달러를 받다가 사직하고 토트네스로 온 윌리엄 라나(43)는 “뉴욕에 있을 때 하루 12시간 이상을 일하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주일에 한 시간도 가족들과 대화를 나눌 수 없었고, 피곤했으며, 늘 짜증을 내며 살았다. 연봉이 높아질수록 여유는 더 없어졌다”고 했다.

강원도 한 폐교 운동장에서 만난 반공소년 이승복. 이 동상 앞에서 갑작스레 생명공학의 발전에 대해 염려되는 까닭은?


서울을 떠나 또다른 ‘서울’로 휴가 가는 사람들

미샤(23)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런던에 살 때는 항상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갔죠. 휴식이 없고, 잠을 자려고 할 때조차도 베개를 베고 누워도 집 밖, 길거리에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가게는 24시간 열려 있죠. 런던의 그러한 것들이 저에게 큰 불안을 가져다주었어요.” 공해, 소음, 속도, 그리고 치열한 경쟁. 그럼에도 매년 휴가철이면 사람들은 런던, 뉴욕, 파리, 도쿄, 이국의 대도시로 여행을 떠나고, 대도시에 경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방인에겐 낯설겠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또다른 ‘서울’이 그곳에 있을 뿐인데. 칠랑이 계곡의 길들이 입 끝을 S자로 그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구문소로 향하던 길에서 이름 없는 샛길로 빠졌다. 연화산 아랫자락을 넘어가는 그 길은 낙둔지에서 서울과 강릉을 잇는 철도와 만났다가 헤어지고, 우리는 짐을 잔뜩 실은 대형트럭의 뒤를 따라 해발 720미터에 이르는 통리재 정상에 이르렀다. 여기서 기찻길을 바라보면 첩첩 산들이 기찻길보다 아래에 있어 화차들은 마치 하늘역을 향해 떠날 것 같다. 한때 엄청난 양의 석탄을 실은 화차들로 수없이 지나다니던 이 길. 나는 문득 석탄 소비량이 줄면서 땅속 깊이 묻힌 채 사라진 길들을 떠올렸다. 갱도. 길은 끊임없이 태어나고, 한 시절 영화를 누리다가 소멸하기도 한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죽은 갱도는 마치 땅 밑으로 뻗은 어둠의 가지가 아닐까. 어쩌면 그 가지 끝마다 고향 떠난 광부들의 꿈이 검은 꽃잎처럼 맺혀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노변에 세워둔 차에 다시 오르며 427번 지방도로 핸들을 꺾었다.

혜성사 이정표를 따라 소로에 들어서면 길의 끝에서 넓지 않은 공터를 만나게 된다. 말하자면 주차장이다. 여기서부터는 좁은 산길을 내려가야 한다. 예전엔 늦은 밤에 도착해서 손전등 불빛을 징검다리 삼아 얼마나 힘겹게 길을 내려갔었는지 모른다. 늦은 밤에 들이닥친 불청객을 당연하게도 내쫓았던 스님께서 여전히 툇마루에 앉아 계셨고, 혜성사 좁은 마당을 지나 미인폭포로 내려갔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던 탓인지 미인폭포의 수량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50미터에 달하는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통리협곡과 어우러져 경이로웠다. 나는 편안하게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너른 바위 하나를 택해 눕기로 했다. 햇살이 협곡의 이마를 지나 폭포 아래 못에 닿을 때까지만 누웠다 길을 떠나자. 오늘의 뜬구름은 1억5천만년 전에 형성된 협곡 사이에 모습을 나타냈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그건 마치 억겁의 시간 속에서 하루살이처럼 사라지는 우리들의 생인 듯했다.

하루라는 오늘 /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 뜨는 해도 다 보고 /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 나는 살아 있지만 /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 천 년을 산다고 해도 / 성자는 / 아득한 하루살이 떼

- 조오현의 <아득한 성자>

연화산 자락을 지나가는 태백선 철도와 샛길이 만난다.

산을 흠뻑 맞았으니 이제는 바다로

어느새 차가운 바위와 맞대고 있던 뒤통수가 차갑다. 몸을 일으켜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후우. 햇살이 폭포 아래 못과 ‘쨍’하고 닿았다. 아이 차가워! 햇살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고,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피터 비욘 앤 존(Peter Bjorn & John)의 . 먼저 자리를 뜬 K와 L형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어이, R! 그만 가자. 비탈길을 올라서며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는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 다시 길 위로 나섰다. 427번 지방도는 이제 신리재를 넘어 가곡천을 따라 이어지고 길은 서늘하게 아름답다. 우리는 신리 큰다리목에서 417번 지방도를 따라 가곡면 방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거제도까지 내려가려면 남쪽으로 가야 하고, 산을 흠뻑 맞았으니 어서 바다를 만나고 싶은 마음도 한몫했다. 동활계곡과 가곡천을 지나는 길에는 여러 개의 플래카드들이 붙어 있었다. ‘가곡 인구 늘어나네 덩실덩실 춤추세’, ‘아픔을 모두 딛고 새 희망을 만들어 보세’. 공부해라, 대학 가라, 재테크해라, 그런 명령형 문장들로 포화상태인 도시를 벗어나 춤추세, 보세, 하세, 하나같이 청유형 종결어미로 끝나는 문장들을 연달아 읽고 있으려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상하가 따로 없고, 빈부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다 같이 어깨동무하는 청유형.

글 노동효 <길 위의 칸타빌레> 저자·사진 김은주

※지난회 사진가의 이름이 ‘김지은’으로 잘못 표기됐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강원도 여행쪽지

남한에서 가장 큰 동굴지대

◎ 구문소 | 1억5천~3억년 전 물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지형. 황지에서 시작된 낙동강 물길이 동점동에 이르러 산을 뚫고 지나가면서 높이 20~30m, 너비 30m 정도 되는 커다란 석회동굴을 만들어 놓았다. 이 석회동굴을 자개문이라 하고, 그 아래 물이 고여 있는 곳을 구문소라 한다. 조선시대 민중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정감록>이란 도참서에서 이르기를 “낙동강의 최상류로 올라가면 길이 막혀 갈 수 없는 곳에 커다란 석문이 나온다. 그 석문은 자시에 열리고 축시에 닫히는데 자시에 열릴 때 얼른 그 속으로 들어가면 사시사철 꽃이 피고 흉년이 없으며 병화가 없고 삼재가 들지 않는 오복동이란 이상향이 나온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 석문이 낙동강이 산을 뚫고 지나간 구문소의 석굴이라 여겨 ‘자시에 열리는’ 자개문(子開門)이라 불렀다고 한다.

◎ 대이리 동굴지대 | 환선굴·관음굴·제암풍혈·양터목세굴·큰재세굴 등이 흩어져 있는데 모두 합쳐서 대이리 동굴지대라 한다. 그중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에 있는 환선굴은 남한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복잡한 구조를 지닌 동굴로 알려져 있다. 동굴 입구에서 100m쯤 안으로 들어가면 세 갈래 굴이 나오는데 서쪽으로 난 굴이 가장 길다. 동굴 안에는 종유석을 비롯하여 형형색색의 석회암 동굴 특유의 기암이 있고, 백사장이 있어 장관을 이룬다. 희귀 동식물이 살고 있어 생물 고고학상 소중한 자료가 되는 곳으로 인근 대이리 민속마을에서 너와집과 굴피집·통방아 등도 볼 수 있다.

◎ 동활계곡 | 산세가 빼어나고 물이 맑아 산천어 등 천연기념물을 비롯한 담수어종이 많이 산다. 특히 가을철 단풍으로 유명한데, 기암괴석과 수려한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동활2교~4교 사이의 경관이 빼어나다. 상류에는 너와집 등의 민속유물이 남아 있는 신리민속마을이 있고 하류 부근에는 마을의 수호목인 황금소나무가 있다. 인근에 가곡자연휴양림이 있어 자연환경 그대로 유지되도록 조성된 휴양림에서 하룻밤 묵어 가도 좋다.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 맑은 물이 휴양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지닌 이곳은 가곡폭포와 연화폭포 등 작은 폭포들과 엄나무·느릅나무·돌메나무·단풍나무 등의 활엽수가 우거져 가을 여행지로 적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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