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여기자 K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
신문사에서 부서가 바뀔 때 가장 괴로운 건 새 출입처 사람들 얼굴 익히기다. 친한 척하려면 일단 한 명씩 눈도장은 찍어야 하는데, 처음 본데다 공통점이라고는 모두 인간이란 것뿐이니 분위기 썰렁하다. 아는 게 없으니 마땅히 물어볼 것도 없다. 상대가 과묵하면 그야말로 환장하겠다. 이럴 때 명함은 겨울 나는 노숙자에게 신문지처럼 살뜰한 동반자다. 주고받으면서 시간을 끌 수가 있다. 이메일 아이디나 이름이 특이하면 가뭄에 피죽으로 연명하듯 몇 마디 더 할 수 있다. 예전에 한 방송사 피디가 선글라스를 낀 자기 사진을 명함에 붙여서 준 적이 있는데 감동해 버렸다. 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느냐 이런 쓸데없는 질문으로 10분은 너끈히 견뎠다. 최근 발령받은 출입처에서는 개판이었던 이전 출입처의 내 행적은 모두 잊고 잘해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오자마자 홍보실부터 찾아갔는데, 아차, 명함을 챙기지 못했다. 40대 중반의 마음 좋아 보이는 홍보과장이 어색한 웃음을 입가가 파르르 떨릴 만큼 오래 짓고 있는 동안 나는 가방을 거의 뒤집다시피 해 필사적으로 볼펜똥 자국이 역력한 명함 몇 장을 찾아냈다. 연방 “미안하다”며 내미는데, 손이 부끄러웠다. 속으로 주문처럼 되뇌었다. ‘괜찮아, 괜찮아. 내 친구의 친구인 한 기자, 한 번만 봐도 상대를 무장해제한다는 멍한 표정의 그 친구는 경찰서 들어갈 때마다 명함 찾는다고 길거리 좌판 상인처럼 가방 속 물건 다 꺼내 놨다고 하잖아. 그래도 나는 그런 좌판은 안 벌였다.’ 시계 초침 소리가 천둥 같고 커피 넘기는 소리가 폭포 같은, 썰렁한 시간의 사막을 건너다 못해 홍보과장이 건물 안에 있는 전시관을 보여주겠다고 나섰다. 인공 연못 옆을 지나며 친근하게 말을 건네준다. “아이들 데리고 오세요.” 남편이고 아이고 없는데 여기 아이는 ‘들’까지 붙은 복수형이다. “아, 예.” ‘없는데요’ 그래서 더 썰렁해지는 것보다는 그냥 애 여럿인 척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날 밥도 같이 먹게 됐는데 하도 할 말이 없어 “사실은 제가 아직 결혼을 안 해서…”라고 결국 털어놨다. “아 그러신가요.” 또 초침 소리가 천둥이 됐다. “30대 중반에는 남자 잡기가 힘드시죠?” 안다, 상대도 지금 애쓰고 있다. 그래도 솔직히 좀더 어리게 봐줬다면 고마웠을 것 같다. 취재원의 문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내가 답답해 태어날 때부터 기자였을 것 같은 빠릿빠릿한 후배에게 물었다. “나도 괴로워요. 뇌는 집에 두고 일단 몸을 방문 안으로 밀어넣어.” 취재원의 문 앞에 서서 매번 다짐한다. ‘왜 나라고 못하겠나. 홍보실 직원도 기자 찾아오고, 지하철에서는 상인이 모르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고, ‘도를 아십니까’ 족도 모르는 이에게 말 걸고….’ 이렇게 계속 나를 부추기다 보면 피곤해져 마음 한 귀퉁이에서 ‘오늘만 날인가’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하고…. 갈팡질팡하다 보면 또 하루가 간다. [한겨레 주요기사]▶ <한겨레21> “엄마, 난 왜 국제중에 못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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