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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야기만 20년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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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이 가을 주변에 넘쳐나는 고독한 사람들 …고독은 스스로 고독하지 않을 때 비로소 사라지는가 얼마 전 발간한 인터뷰집에서 작가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음 그것은 고통과 고독과 독서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대답을 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선생님 고독할 때 어떻게 하시나요?” 하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가을이라서 그런가 보다. 솔직히 말하면 나로서는 “솔직히 요즘 제 소원이 고독해 보는 겁니다”라는 대답밖에는 할 수가 없다. 새 책이 나오면 일단 작가로서-내가 대가가 아니니 그런 건 안 해요, 뭐 이럴 수도 없고-출판사에 예의를 갖추어주는 한에서 적당히 행사를 한다. 그리고 나는 파김치가 된다. 대개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고 그들이 날 괴롭히거나 악담을 퍼부어서는 아니다. 대개는 정말 정성스레 날 보고 싶어 하고 존중해 주는 사람들인데도 그렇다. 인터넷 독자와의 대화에서 만난 고통의 사연들 그런 후에 집에 돌아오면 나는 거의 신음 소리를 내며 앓는다. 한번은 ‘왠지’ 무섭다면서 밤중에 내 곁에 슬며시 와서 누웠던 막내 제제가 에구구구 에구구구 하는 내 소리를 듣더니 잠들려다가 말고 깔깔거리는 거였다. “뭐가 우스워, 인마!” 내가 물으니, “엄마 꼭 할머니 같아!” 하는 것이었다.
밖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이 나 반갑다고 나오는데, 솔직히 어떤 때는 꼭 커다란 모기 세 마리가 몰려오는 것 같다.(얘들아, 이런 표현 용서해줘. 그래도 엄마는 너희같이 예쁜 모기들에게는 기꺼이 헌혈은 할 거야. 그래도 엄마가 혼자 있고 싶을 때는 너희들도 좀 혼자 있으면 더 좋겠지. 휴우~) 이런 때는 밖에서 일하고 온 남편들이 집에 와서 왜 세 마디만 하는지 이해를 하고도 남는다. 아무튼 그래서 신간을 낸 후에는 어떻게든 행사는 하지 않으려고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려고 온갖 애를 쓰게 되는데, 이번에는 사람들과 직접 만나는 일을 피하려고 인터넷 서점에 댓글 달기를 하기로 했다. 그건 내가 직접 나가지 않아도 되고 앉아서 내가 원래 하던 글쓰기로 때우면 될 것 같아서였다. 작가에게 질문을 하면 내가 짧게나마 댓글을 달아주는 형식이었다. 오래 앉아 있는 것에는 자신이 있어서 비행기 타는 것도 그리 두려워하지는 않는 편인 나는, 내가 생각해도 좋은 선택이다 싶어서 인터넷 서점의 창을 열었다. 작가에게 하고 싶은 질문란에 많은 질문들이 올라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잠들고 사방은 조용한 시간 … 가을이지만 여전히 내 방에서 잘도 버티고 있는 진짜 모기와 씨름하며 나는 느긋하게 사람들의 질문을 읽으며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이 작가에게 하는 질문이란 그리 많이 다르지는 않다. 보통 언제 글을 쓰시나요? 작품의 구상은 대개 어떤 것에서 힌트를 얻어서 하시나요 … 등등 이 직업을 가진 지 20년이 넘었으니 지루하지만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게 묻는 질문의 색깔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독자들은 내게 자신의 내밀한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고, 추상적인 그들의 질문을 읽으면서 나는 그들의 구체적인 정황을 직업병처럼 상상했고 그러자 진이 빠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남편과 이혼을 하고 싶어 하는 여성, 공황장애로 고통 받고 있는 독자, 삶의 무의미와 싸우고 있는 20대 후반의 젊은이, 아이들을 키우며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싱글 맘까지 … 글을 읽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투명인간처럼 잠시 그들의 삶에 스며들어야 했고, 그리고 같은 강도는 아니었겠지만 고통이 느껴져 왔다. 두어 시간 댓글을 달고 났을 때, 나는 또 자리에 누워 나도 모르게 할머니처럼 신음을 뱉았다. 에구구구, 에구구구 …! 아무래도 내가 작가여서겠지만 사람들은 가끔 내게 와서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정말 온 마음을 다해 도와주고 싶은 사람도 있다. 어떻게든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문제를 정확히 보고 있으며,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부끄러워하지 않고 건강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내가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데 있지만,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 주고 나면 그들은 대개는 많이 편안해진 얼굴로 고맙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은 이미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고 있었기에 내가 아니어도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을 사람들이었다. “친구야, 네 이야기에 이제 지쳤어” 나를 제일 힘들게 하는 이들은 몇 년째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래전 한 친구와 멀어지게 된 것도 아마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성 때문이었으리라. 그때 마지막 통화에서 내가 했던 모진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솔직히 나, 네 이야기 이제 지쳤어. 설사 나쁘게 악화되었다 해도 좋으니 새로운 레퍼토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자.” 그 뒤로 그녀와의 우정은 영영 깨지고 말았다. 정말로 화가 난 친구가 나와의 연락을 끊었을 때 나는 가끔 멈추어 서서 내가 내 잘못을 뉘우쳐야 하나, 하고 여러 번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어쨌든 그녀가 그리웠다. 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후회하고 있지는 않았다. 10년쯤 지난 요 몇 년 전, 나는 미안하기도 한 마음에 그 친구를 다시 찾아냈다. 반가운 마음에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역시 우리는 오래된 친구여서 의례적인 서론 없이도 본론으로 들어가는 미덕을 보여주었고 곧바로 우리들의 깊숙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친구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한 이야기는 또 그 이야기였다! 처음 든 생각은 인간이 변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20년 동안 반복되는 그녀이야기의 요지는 이거였다. “남편하고 너무 맞지 않은데 이래이래 저래저래 눈들이 무서워서 나는 아직도 그와 살고 있고, 그도 나도 괴롭다” 솔직히 그 친구를 다시 찾아낸 내 자신이 미웠다. “내 생각에 그 남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눈을 거슬리게 하지 않는 것이 네 목표이니 네 인생은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이잖아. 그러니 계속 그렇게 살아. 그리고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친구는 돌이킬 수 없이 상처 받은 것 같았다. 헤어진 뒤 그 친구의 메일에는 힘들다, 외롭다, 고독하다 같은 말들이 넘치고 있었는데, 나는 전혀 마음이 아프지 않았고 솔직히 지긋지긋했다. 그런 의미에서 난 참 너그럽지 못한 인간인지도 모른다. 예전에 내가 정말 힘들고 외로웠던 시절,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주로 독자들의 리뷰였지만 -심한 엄살을 부리고 있다는 말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어느 순간, 나는 사람들에게 이해받기를 포기했고, 나 스스로 책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 내 상황을 변화시켜 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 어느 정도는 그런 일에 성공을 할 수 있었다. 요즘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곤 한다. “좋아, 아주 편안해 … 심지어 가끔은 행복하기도 하다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말한다. “네가 말은 그렇게 해도 얼마나 힘들겠니? 내가 도와줄 일은 없을까?” 참 이상하게도 그건 내가 실제로 아파서 어쩔 줄 모를 때 듣고 싶은 위로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라고 다를 건 없다. 아이들이 심심해, 심심해 하면서 놀아 달라고 하면 갑자기 내가 써야 할 글들이 떠오르면서 그렇게 바쁠 수가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조용해져서 나가 보면 혼자 책을 보거나 티브이를 보면서 만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면 나는 다가가서 괜히 볼도 꼬집어보고 곁에 앉아 툭툭 건드려도 보면서 말을 거는 것이다. “심심하다면서? 엄마랑 체스 한판 할까? 아까 엄마보고 놀아달라고 했잖아!” 그러면 십중팔구 아이들은 신경질을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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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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