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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해적 천국 소말리아 연매출 1억달러…어부들의 해적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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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쏙] 21세기 해적 천국 소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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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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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배로 뛴 아덴만 통과 선박 보험료
1000명 넘어선 `인질사냥꾼’ 탓이다
유럽국가는 산업폐기물 버리고 가고
아시아 어선들이 물고기 씨말린 바다
로켓포·GPS로 무장한 ‘해적’들은
악당인가 아니면 수탈에 맞선 전사인가
해적이 돌아왔다
‘아프리카의 뿔’ 소말리아의 아덴만. 지난 4월 프랑스 호화 유람선 르포낭호가 납치된 것은 해적 시리즈의 시작일 뿐이었다. 9월25일 러시아제 T-72 탱크 33대를 비롯해 3천만달러어치의 중화기를 실은 우크라이나 화물선 파이나호가 납치된 것은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저 엄청난 무기는 무엇이며 누가 어디로 보내는 것인가.’ ‘저 무기들이 소말리아 반군이나 테러리스트에게 넘어가면…?’ 의문은 공포가 됐고, 세계 최강 미국·러시아는 아덴만으로 함대를 파견했다. 두 강대국은 선원을 풀어주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다. 그러나 해적들은 코웃음을 쳤다. 고함을 지르면 들릴 만한 거리에서 대치한 지 40여일째. 되레 해적들이 “공격하면 무기와 배를 폭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대는데, 세계 최강 함대들은 그저 속수무책이다. ‘도·대·체 이토록 간 큰 녀석들은 누구냐?!’ 영화 속 박제된 소재인 줄 알았던 해적이 21세기 국제뉴스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아니, 해적은 돌아온 게 아니다
최첨단 장비로 지구 구석구석을 들여다본다는 세상에 어떻게 해적질이 가능할까 의아할 노릇이다. 하지만 유사 이래 해적들은 잠시 잊혀지긴 했어도 바다를 떠난 적은 없다. 그리고 늘 강한 세력들을 괴롭혀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해적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고, 로마제국군은 터키 살레지아 해적들에게 패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 해적에게 붙잡혔다가 몸값을 내고 풀려났다. 근세에 가까워질수록 해적들은 더욱 ‘발전’했다. 유럽의 신대륙 침공길엔 늘 해적들이 북적였다.
남중국해에서도 어업 비수기인 음력 3월께면 어민들이 ‘계절성 해적’으로 변해 한철을 났다.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믈라카(말라카) 해협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현대판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인도네시아 아체 반군의 지원을 받는 이곳 해적들은 2004년 한 해에만 선박 25척을 공격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인근 세 나라가 합동 순찰과 단속을 강화하면서 올해는 공격 횟수가 2건에 그쳤다. 그래도 사라지진 않는다. 정정이 불안한 시대, 핍박이 심한 시대, 평범한 이들이 입에 풀칠하기 힘든 시대에는 늘 해적이 극성을 부렸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잃을 것 없는 어부들의 반란…일부 해적들 호화 생활
18년에 걸친 내전이 온나라를 갈기갈기 찢어버린 소말리아에선 권력 공백을 틈타 해적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소말리아는 1991년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 정부가 몰락한 뒤 이슬람 군벌이 난립하면서 그야말로 무법천지로 변했다. 2003년 극심한 가뭄까지 덮쳤다. 소말리아에선 어린이 4명 중 1명이 5살을 못 넘기고 생을 마감한다. 고통은 이제 뉴스거리도 안 된다.
더 잃을 것이 없어진 어민들은 어망을 놓고 총을 들고 고등어잡이 대신 인질사냥에 나서고 있다. 소말리아의 호비오, 하라디헤레는 17세기 카리브해 토르투가섬처럼 해적들의 천국으로 변했다. 2005년 100여명이었던 해적은 지금 1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선진국 선박을 납치해 몸값을 뜯어낸다. 영국의 외교 전문 두뇌집단 채텀하우스는 해적들이 몸값으로 챙기는 돈이 연간 1억달러(우리돈 1250억원 가량) 정도라고 추산한다. 떼돈을 번 해적 두목급들은 고급 자동차와 호화 저택을 사들이고, 아내를 4명까지 거느릴 정도다. 부패한 정부 관리들과 내통하고, 반정부 테러조직 알샤바아브 등에도 자금을 댄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들의 주 활동무대는 최근 아덴만으로 더욱 넓어졌다.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지 않고 곧장 수에즈 운하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세계 석유 운반선의 30%가 이 길을 지나며 한 해 모두 1만6천척이 오간다. 해적들에겐 먹잇감이 널린 셈이다.
첨단장비로 해적들의 경쟁력도 업그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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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별 해적들의 공격 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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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0년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역로에서 골칫덩어리였던 믈라카 해협 해적들은 폭이 좁고 암초가 널려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배들이 빠른 속도를 내지 못하는 점을 노렸다. 작은 고속정으로 느린 화물선이나 유조선을 따라잡아 배에 줄을 던져 곡예하듯 올라타서는 기관총으로 승무원들을 위협해 돈을 강탈해 갔다. 이 때문에 국내 유조선들도 돈이 없을 경우 해적들이 승무원들에게 해코지를 할 것을 우려해 비상금조로 일정액을 배에 늘 놔뒀을 정도다.
소말리아 어부 해적들도 비슷하다. 소말리아 해적들의 주무대인 아덴만은 깔때기처럼 생겨 바닷길이 갑자기 좁아진다. 여기에 소말리아는 해안선이 3300㎞에 이르러 아프리카에서 가장 길다. 해적들은 바로 이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다. 소말리아 북쪽에서 홍해로 들어가려고 배들이 속도를 늦추는 지점에서 배를 덮친 뒤 재빠르게 도망친다.
여기에 앞서 뜯어낸 몸값으로 계속 해적 장비를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위성전화와 지리정보시스템(GPS) 장비로 약탈 대상을 쫓고, 기관총과 로켓포로 위협한다. 먼 공해상에 커다란 모선을 띄워놓고 작은 저인망 어선으로 갈아타 선박을 사냥한다. 이들에겐 애꾸눈에 해골 깃발은 없다. 작은 어선으로 다니는 검은 얼굴은 영락없는 가난한 어부다. 하지만 이들이 해적으로 돌변해 배 위로 오르기까지는 15분도 걸리지 않는다. ‘앗, 해적이다’를 외치는 순간 이미 상황은 끝난다.
국제해사기구(IMO)는 올해 소말리아 해적의 공격이 75%나 늘었다고 발표했다. 지난 1~9월 사이 전세계 바다에서 보고된 해적 공격 199건 가운데 소말리아에서 일어난 것이 63건. 이중 51건이 아덴만에서 일어났다. 이 바람에 요즘 아덴만을 통과하는 선박의 보험료는 10배나 뛰었다. 경비업체를 고용하거나, 2~3주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끝 희망봉 쪽으로 돌아가는 항로를 택하는 실정이다.
왕년 해적제국 영국 등 소말리아 해적 소탕에 총출동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지난 6월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외국 군대가 소말리아 영해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군함 7척도 소말리아 해역에 진입해 순찰에 들어갔고, 다음달부터는 유럽연합이 소탕 작전을 시작한다. 공교롭게도 해적 소탕 작전을 지휘하는 본부가 영국 런던에 꾸려진다. 전체 작전 지휘는 필립 존스 영국 해군 부총독이 맡는다. 해적을 통해 해양대국으로 떠올랐던 영국이 해적을 잡으러 나서는 역사의 아이러니인 셈이다.
해적의 역사에서 영국은 가장 중요한 나라다. 15~17세기 ‘대항해의 시대’, 스페인을 물리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 영국은 사략선(해적선)들에 나포 허가서를 남발했다. 당시 노략질에 성공한 해적들은 국가적 영웅으로 왕에게 직접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악명 높은 해적 헨리 모건은 영국령 자메이카의 부총독까지 지냈다.
전쟁 끝난 경호업체들에는 새로운 황금시장
소말리아 해적들 덕분에 신이 난 업종도 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경호업체들이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이라크 전쟁도 이제 끝물. 치안이 안정되면서 경호업체들에겐 시장이 줄어들고 있다. 경호업체들은 이제 해적으로부터 선박을 경호하는 분야를 새로운 ‘성장 시장’으로 보고 있다. 이라크전에 참여했던 할로포인트는 물론, 지난해 이라크에서 민간인 17명을 사살해 물의를 일으켰던 블랙워터까지 이 대열에 합류했다. 블랙워터는 헬리콥터와 무장병력을 태운 배를 동원해 소말리아를 지나는 선박 호위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이미 15개 업체가 경호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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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해적 천국 소말리아 연매출 1억달러…어부들의 해적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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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현실…몇년째 납치 되풀이
소말리아 앞바다를 지나는 우리나라 선박은 연간 460여척. 참치 잡는 원양어선에서부터 유럽으로 가는 자동차 수출 선적까지 다양하다. 피해도 속출했다. 2006년 동원호를 시작으로, 2007년 마부노 1·2호, 올해는 9월 브라이트 루비호가 납치됐다.
하지만 이들 납치 선박들은 언론의 조명을 크게 받지 못했다. 언론의 관심 부족, 그리고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정부의 원칙 속에서 선주들은 결국 자구책을 찾아나섰다. 한국선주협회는 올해 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해상 경호업체들을 공동 고용하기로 했다. 이들 업체가 제시하는 6만~20만달러에 이르는 경호비를 단체협상으로 줄여보려는 생각이다. 현재까지 40여개 업체가 참여 뜻을 밝혔다. 선주협회까지 나서자 결국 정부가 움직였다. 국방부는 소말리아 해역에 해군 파병의 타당성을 조사하는 정부합동실사단을 파견해 지난달 31일까지 현장조사를 벌였다. 파병이 결정되면 이순신함급 한국형 구축함이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수탈의 희생자들, 약탈로 부메랑을 날리다
해적은 악랄한 범죄자일 뿐이다. 그렇지만 소말리아 해적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파이나호를 납치한 해적들은 스스로를 ‘중앙지역 해안경비대’라고 주장하며 해안의 보호자를 자처한다. “우리 해안에서 불법 조업하면서 오물을 버리는 이들이야말로 바다의 도둑”이라고 강변한다. 케냐 주재 소말리아 외교관 모하메드 오스만 아덴도 “소말리아 어업 보호를 위해 해적질이 시작됐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1990년대 초반, 유럽 국가들은 감시가 소홀한 소말리아 해안에 산업폐기물을 몰래 버렸다. 불법 남획도 심각했다. 소말리아 북부 푼틀란드 자치주의 압둘왈리 압둘라만 가이레 항만·어업부 차관은 “그동안 타이와 유럽, 예멘, 한국의 배들이 ‘골드러시’ 때처럼 몰려들었다”고 전했다. “소말리아 해적들은 몸값으로 연간 1억달러 정도를 챙기지만,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이 이 지역에서 어자원을 남획해 챙기는 돈은 3억달러 가량이다.”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대학의 해적 전문가 피터 레어 교수는 이렇게 비판한다.
미국이 벌인 ‘대테러 전쟁’도 오히려 해적을 키운 원인으로 꼽힌다. 2006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를 장악한 이슬람반군 ‘이슬람법정연대’(UIC)가 해적과 연계된 여러 반군 집단을 제압하면서, 해적의 활동은 크게 위축됐다. 하지만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이들을 알카에다의 협조자로 지목해 공격하면서 또다시 혼란이 벌어졌다. 유엔이 지원하는 과도정부가 들어섰지만, 거의 허수아비 정권 수준이어서 혼란은 계속됐다. 숨죽였던 해적들은 다시 바다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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