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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12 21:56 수정 : 2008.11.16 14:17

제주도에서 말을 타기엔 일몰 무렵이 가장 좋은 시간대다. 초원과 바다와 구름과 태양이 어우러진 풍경은 눈에 보이는 그 자체로 예술이다.

[매거진 esc] 노동효의 아웃오브서울 ⑤
제주도 초원에서 말을 몰며 새로운 여행의 시작을 꿈꾸다

부산연안여객터미널에서 코지 아일랜드(Cozy Island)호에 올라탔다. 아늑하다는 뜻의 ‘코지’는 우리말로 ‘곶’의 제주도 방언이기도 하다. 나는 제주도에서 카우보이가 될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히스 레저처럼 말 타고 소 떼를 몰지는 않겠지만, 여하튼 <한라 마운틴>의 말과 사슴을 기르는 목장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카우보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물론 목장에 눌러앉아 한세상 다 보낼 생각은 없다. 그저 ‘개인적으로 더 의미 있는 활동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을 생각으로 애초부터 한정된 기간만 종사할 의도로 접근하는 직업’이다.

제주도는 길의 천국이다. 제주도 위에 거미줄을 내려놓은 듯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지며 무수한 샛길들로 뻗어나간다.

드디어 배를 타고 ‘아늑한 섬’으로 출발~

<제너레이션 X>의 저자 더글러스 커플런드는 이것을 ‘반안식적 직업’이라고 칭했다. 그의 책이 출판된 해는 1991년. 이듬해 한국에선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과 함께 1970년대에 태어난 ‘신세대’가 등장했다. 뒤이어 신세대 이전 세대들에겐 ‘386 세대’라는 라벨이 붙었다. 나는 종종 이 두 세대가 기치로 내세웠던 가치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잘은 몰라도 386 세대의 기치는 ‘정의’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신세대의 기치는 아마도 ‘자유’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지금 이 나라를 한마디로 딱 잘라서 이렇게 이른다. 배신자들의 나라. 가령 “니네 아빠 한 달에 얼마 벌어?” “니네 아파트는 몇 평이야?”라고 천연덕스레 묻는 아이들은 다름 아닌 ‘386 세대’와 ‘신세대’의 아들딸들이다. 아들딸은 부모의 대화를 듣고 배운다.

서울을 출발해 강원도의 폐교, 동해안의 월송정, 거제도의 구조라 해수욕장을 지나 제주항에 차를 내려놓았다. 나는 모슬포에서 사진 찍는 H를 만나 저녁 무렵에야 제주도 중산간으로 올라갔다. 삼나무 숲과 나란히 달리는 도로가에 세워져 있는 팻말. ‘말 타는 곳’. “오늘은 자고 내일 천천히 일을 배우면 돼.”

버려진 마구간에 딸린 방 한 칸이 숙소라고 했다. 삼나무는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자라는 나무. 방문을 열자 천장이며 벽이며 온통 곰팡이로 가득했다. 네 모서리에 매달린 거미들이 불청객을 동시에 째려보았다. 넌 뭐야? 바닥엔 지네가 발을 뻗고 죽어 있었다. 맙소사! 첫날 밤 나는 방 안에 텐트를 치고, 어쨌든, 잤다. 그러나 이튿날 저녁, 숙소로 돌아온 나는 더는 그 방에서 잠들 수가 없었다. 부화한 곤충의 애벌레들 수천, 아니 수만 마리가 어디 한번 같이 놀아 보자며 방바닥에서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쪽 컨테이너를 비워 주시지 않으면 제 차에서 지낼 테니 그렇게 아세요.”

결국 나는 초원 한가운데 컨테이너를 차지했다. 해발 500미터, 멀리 제주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더없이 전망이 좋은 자리였다. 컨테이너 안의 짐을 옮기고, 바닥의 묵은 때를 닦자 비록 샤워시설이나 화장실은 없지만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이 되었다. 흠, 컨테이너 외벽에 꽃이라도 그려 넣으면 히피들의 거주지처럼 보이겠군! 나는 기대 이상으로 만족했다.

아침 7시. 컨테이너의 문을 열어젖힌다. 들판에서 풀을 뜯던 사슴들이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100마리가 넘는 사슴 떼가 들판에서 풀을 뜯는 모습은 장관이다. 승마목장과 사슴목장 사이에 울타리가 없다면, 아프리카 세렝게티 공원이라고 해도 의심하지 못할 풍경. 어이, 좋은 아침! 사슴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며 목장의 사무실로 나가는 길. 수평선을 따라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이제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슬슬 일을 시작해 볼까.


더~ 더~, 더~ 더. 초원에서 풀을 뜯거나 잠든 말들을 모은다. 안장을 채우고, 재갈을 물리고, 손수레로 사료를 싣고 와 열두 마리 말들에게 먹인다. 이 녀석들은 승마장에 말 타러 오는 손님들을 태우기 위한 말들이다. 다시 사료를 트럭에 싣고 제2목장으로 간다. 더~ 더~, 더~ 더. 언덕을 넘어 말 수십 마리가 달려온다. 그렇게 제3목장까지 돌고 나면 마지막으로 종마에게 먹이를 주러 가야 한다. 해가 솟아오르자 땀이 배기 시작한다. 이제 말똥을 치워야 할 시간. 말들이 풀을 먹고 소화하고 배설한 똥에서는 풀 냄새가 난다. 말 한 마리가 하루 평균 5㎏에 이르는 똥을 싸대니 그 양은 정말 엄청나다. 날마다 똥을 치우다 보면 미추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들이 있다. 어느 날엔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초록색 풍뎅이가 날아와 말똥 위에 앉았다, 새파란 하늘 위로 날아가기도 했다. 그 모습에선 어떤 아름다움도, 추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그러할 뿐.

서울을 출발해 강원도의 폐교, 동해안의 월송정, 거제도의 구조라 해수욕장을 거쳐 말들이 뛰노는 제주도 중산간에 왔다.

세렝게티가 이보다 아름다울쏘냐

“병장 말년 때였는데 말이야, 내무반에서 술을 마시다 안주가 다 떨어진 거야. 그때 마침 연대본부 수족관의 열대어가 딱 떠오르더란 말이야. 그래서 열대어를 잡아 와서 취사병을 깨웠지. 이거 회 쳐!”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병장님, 안 됩니다, 안 됩니다 하는 취사병보고 안 되는 게 어딨어, 너 죽고 싶어? 소리를 질렀더니 결국 회를 쳐 오더군. 물론 다음날 죽은 건 나지. 말년에 영창 들어가서.”

그랬던 Y도 이젠, 스스로, 철이 들었다 한다. 그는 승마조련사가 되려고 제주도에 왔다. “근데 열대어 회는 맛이 어땠어?” “술 취했는데 그 맛이 기억나겠어?” “하하하!” 저녁이면 둘러앉아 잔에 소주를 따라 마시곤 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일을 배우며 길동무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길 위의 가장 큰 기쁨. 중년의 목장장은 한때 고기잡이배의 선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바다에 떠 있는 배의 방향과 불빛만 봐도 어디로 무엇을 잡으러 떠나는 고깃배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바다에선 닻이 생명줄이에요. 태풍 불 때 닻이 끊어지면 끝장이에요. 그날 바다에 나갔는데 태풍이 올라왔어요. 그런데 내 배의 닻이 끊어져 버린 겁니다. 다른 배에 계속 구조신호를 보냈죠. 살 수 있는 길은 닻이 있는 다른 배에 내 배를 묶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런데 폭풍우 치는 바다에선 아무도 도와주러 가지 않아요. 닻 올리고 구조하러 가는 사이에 침몰해 버리니까. 죽을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데, 배 한 척이 왔어요. 목숨을 건졌지요. 그리고 몇 년 뒤 바다에 나갔는데 이번엔 나를 구해준 선장 배의 닻이 끊어진 거예요. 그 선장이 계속 구조신호를 보내왔어요. 내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고, 그래서 고민을 했어요. 결국 폭풍우 속에서 닻을 올리려는데 다른 배에 탄 동료들이 무전을 보내오는 거예요. 닻 올리면 네가 죽어, 너뿐만 아니라 네 선원들 다 죽어. 다른 사람 목숨까지 걸린 문제니 갈 수가 없었어요. 망설이는 사이 배는 침몰했어요. 그길로 다시는 배를 타지 않았어요. 배를 팔고, 매일 술만 마셨어요. 죄책감 때문에 맨정신으론 살 수가 없었어요. 세월이 흐르고, 이제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바다 대신 찾은 직장이 이 목장이죠.”

목장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목장 일을 시작했는데 우연이라면 기막힌 우연, 희한하게도 목장 옆 묘지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선장이 묻혀 있었다. 그는 목장에서 지내며 그 무덤에 풀이 자라면 풀을 베러 간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말없이, 홀로, 풀을 베러 갔다 오곤 한다.

“<타이타닉>을 보면 마지막에 한 명씩 물속으로 가라앉는데, 진짜 그래요. 겨울 아니래도 바닷물이 계속 체온을 빼앗아가니까, 그 뭐냐 저체온증으로, 정신이 희미해지고, 그러면 가라앉아 버려요. 친구가 타던 배가 침몰했어요. 각자 구명튜브를 잡고 매달려 있었는데 구명튜브 하나가 부족했어요. 그래서 친구는 동료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죠. 서로 정신 잃지 말라고 격려를 하면서 버티는데 시간이 지나자 한 사람, 한 사람씩 가라앉았어요.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한 명씩 물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는 기분이 어떨 거 같아요? 다 죽고 딱 한 사람만 살아남았어요. 누군 줄 아세요? 동료 어깨에 매달려 있던 제 친구예요. 자기가 붙잡고 있던 사람이 가라앉는 걸 보면서 삶과 죽음이 한순간이란 걸 번쩍 깨달았죠. 살고 죽는 건 정말 한순간이에요. 찰나예요.”

태어나는 동시에 인간은 바다에 내동댕이쳐진 채 구명튜브에 매달린 존재가 된다. 그곳에서 삶과 죽음은 한순간이다. 한순간을 놓치면, 비록 살아 있다고 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는 산송장에 불과한 것이다. 내겐 선지식과 다를 바 없는 길동무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나는 홀로 목장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자판 위를 토닥토닥 달리곤 한다. 간혹 말들이 초원에서 내려와 마구간 앞마당의 커다란 물통에 코를 박고 물을 마시다가 그런 나를 바라본다.

보름달이 뜨던 밤, 나는 하얀 유니콘으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일어나 나는 <장자>를 떠올렸다. 내가 유니콘 꿈을 꾼 것일까, 유니콘이 내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잠시 선 정박지에서도 여행은 계속 이어진다

“이봐, 카우보이! 삼나무 숲 위로 보름달이 떴어.” “그렇군, 정말 환상적인 밤이야.” 말들이 들판으로 돌아가고 보름달이 정수리 위로 지나갈 무렵 샤워를 한다. 물통 가득 고인 달빛을 몸에 붓는다. 안 춥냐고? 춥다. 그렇지만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다. 이제 들판 한가운데 컨테이너로 돌아갈 시간.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사슴의 눈동자에 알몸의 사내가 달빛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맺힌다. 나는 컨테이너 문턱에 걸터앉아 밤바다를 내려다보며 롤프 포츠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그는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행의 자유를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그 일이 여행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또다른 여행이 또다른 지혜로 나를 이끌어 줄 것이다.

제주도 앞바다에서 핵폭풍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뭉게구름, 그 사이로 일곱 빛깔 무지개가 살짝 눈을 흘긴다.

제주 오름 여행쪽지

다랑쉬오름에서 보름달 바라기

◎ 다랑쉬오름 | 제주도에는 368개의 오름(기생화산)이 산재한다. 제주도의 진면목을 보려면 반드시 오름을 경험해야 한다. 다랑쉬오름은 해발 382m, 동북지역에서는 가장 높고 큰 오름이다. 오름들은 바깥에서 바라보면 여인의 젖가슴처럼 생긴 언덕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제각각 다른 모양의 분화구를 감추고 있다. 꼭대기에서는 성산과 우도가 보이고, 1.5㎞에 이르는 분화구 테두리를 따라 걷노라면 태고의 신비가 느껴진다. 필자는 다랑쉬 정상에서 키 작은 소나무를 바람막이로 삼고 비바크(Biwak)를 한 적이 있다. 다음날 새벽 “저기 사람이 죽어 있어요”라고 소리치는 여자 목소리 때문에 잠이 깼는데, 침낭에서 머리를 내밀고 자던 필자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다랑쉬에서 비바크를 하며 바라본 보름달은 정말 환상, 그 자체였다.

◎ 거문오름 | 한라산 북동쪽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동부관광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다. 말굽형 분화구로서 전체 능선이 아홉 봉우리로 이뤄져 있고 분화구 중심에는 알오름이 솟아 있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한라산을 중심으로 거친오름, 성널오름, 물장오리, 물병아리 등 이름난 오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직박구리, 제주휘파람새, 동박새, 곤줄박이, 박새, 어치와 같은 텃새가 살고 있고, 팔색조, 삼광조, 흰눈썹황금새와 같은 철새들이 날아온다.

◎ 용눈이오름 | 다랑쉬가 하나의 오름으로 이뤄져 있다면 용눈이오름은 세 오름이 서로 겹쳐지며 마치 용이 노는 듯, 용이 누운 듯 보인다고 해서 용눈이오름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세 개의 분화구 테두리를 따라 용눈이를 걷다 보면, 오름과 내림을 반복하는 사이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에 놀라게 된다. 높낮이에 따라, 시선의 각도에 따라 순간적인 공간이동을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엔 한 바퀴를 다 돌아 처음 출발한 지점에 왔을 때, 미로 안에 들어온 듯했다. 분명 한번 지나친 곳인데 조금만 서 있는 위치나 시선의 각도를 달리하면 전혀 낯선 곳에 있는 듯한 환각에 빠진다.

글 노동효 <길위의 칸타빌레> 저자·사진 Jay’s photography

‘노동효의 아웃오브서울’을 마칩니다. 성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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