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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19 20:54 수정 : 2008.11.23 14:44

향수병의 특효약 지중해 매운고추.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매거진 esc]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파스타 멀미증에 한국 음식 그리울 때
위장을 위로하던 자연산 회와 소 갈빗살

시칠리아 동네 애들한테 마마 호환보다 무서운 건 뭘까. 쉬는 날이면 나는 주방장 주세페네 집에 얹혀 있는 객식구가 된다. 혼자 전갈 나오는 자취방에서 구르느니, 별 먹을 게 없어도 주세페네 가는 게 낫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인 주세페의 아내 마리아 아줌마는 그야말로 동네에서 ‘심파티카’하다고 소문난 여자다. 깊은 갈색 눈을 가진 그녀는 남에 대한 배려가 깊고, 마음 씀씀이가 너그러웠다. 이탈리아에서 ‘심파티코(카)’하다는 건 사람이 지혜롭고 평판 좋다는 뜻으로, 모두들 좋아한다는 얘기다.

시칠리아 섬에서 법어를 내릴 줄이야

마리아 아줌마는 뼈다귀만 내세웠지, 별 볼일 없는 주세페 가문에 시집와서 고생도 많았다. 한동안은 바닷가에 피자집을 차려놓고 한여름 휴가도 반납하고 피자를 구워 팔고, 생맥주를 나르며 갖은 고생을 했다. 주세페가 시내 중심에 번듯하고 유서 깊은 소극장 건물을 세내어 고급 식당을 차릴 수 있었던 것도 마리아 아줌마의 공이 컸다.

주세페네 놀러 가면 어린 두 딸의 재롱도 보고 다 재미있지만, 식사 시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주세페네 냉장고를 열어봐야 엉뚱한 재료들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된장, 간장, 쌀… 도 닦는 선승에게나 딱 어울릴 만한 식재료밖에 없다. 애들 먹일 우유와 비스킷(이탈리아에서 비스킷은 과자가 아니라 식사 대용이다)이 고작이다. 마리아 아줌마는 동양에서 온 내게 끊임없이 물었다.

“된장은 어떻게 먹지? 빵에 발라 먹나?(실제로 그이는 빵에 된장 발라 먹는 걸 즐긴다) 국을 끓인다고? 으흠… 간장은 어떻게 만드는 거야? 된장과 간장이 원래 같은 거라고? 아니, 어떻게 이게 같다는 거지?”

요리 견습생 주제에 내가 이 허허벌판 시칠리아에서 가르칠 일도 있구나, 내심 기꺼운 일이었다. 그이의 팔뚝에는 팔찌가 늘 걸려 있는데, 나는 가톨릭 신자들이 차는 묵주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염주였다. 그이는 신도 수가 딱 열 명인 이 시골도시의 불교신자 교주였다. 남편들이 눈를 부라리며 종교박해를 거듭해도, 순교자적 태도로 마리아 아줌마 집에 모여 비밀회합(?)을 가졌다. 내가 ‘부디스타’(불교신자)라는 걸 알고부터는 마리아 아줌마의 날 보는 눈이 달라졌다. 뭐, 법어(法語) 같은 거나 한 번 내려 달라는 건가, 나는 난감했다. 군대 시절, 초코파이 얻어먹고 고참들 등쌀 좀 피해 보려고 얼치기로 다녔던 절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그래도 <반야심경>의 도입부 딱 두어 줄을 외울 줄 안다는 게 마리아 아줌마에게는 종주국의 선승 같았을 거다.

한번은 마리아 아줌마와 함께 학교에 갔다. 재학생의 어린 동생들이나 학부형들이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학교에 드나드는 게 마음이 푸근해졌다. 아직 미취학인, 재학생의 동생이 뒷자리에 앉아서 장난질을 치고 있었다. 뭐, 요즘 세상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나도 졸지에 무슨 학부형 꼴이 되어 초등 1학년 담임인 마리아 아줌마의 수업을 참관했다. 마침 그 수업은 ‘재난 대피 훈련’이었다. 말하자면 민방위훈련 같은 거였는데, 이게 시칠리아만의 독특한 훈련이었다. 아이들은 마리아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탁자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줄을 지어 복도로 나와 벽에 바짝 붙어 서서 조금씩 이동하는 연습을 했다.


숨바꼭질처럼 즐거운 소동이었지만, 마리아는 꽤나 호되게 주문을 했다. 그러고 보니 복도에도 커다란 안내판으로 재난 대피 요령이 그려져 있었다. 그랬다. 시칠리아는 지진의 땅이었다. 마리아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시칠리아는 지진이 잦아. 이 도시는 몇 세기 전에 몽땅 무너져서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어. 1만명 이상이 죽었다우. 그 때문에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섰고, 우습게도 새로운 건축양식의 보물단지가 됐지.”

그 건축양식이란 바로크풍이다. 바로크 사조는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유럽을 풍미했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 르네상스나 고딕 양식이 일반적인 이탈리아의 건축양식에서 바로크식 건축물은 독특한 양식으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시칠리아가 바로크 양식의 살아 있는 현장이 된 건 이런 아픈 사연이 숨어 있었다. 물론 그이와 주세페의 선조들도 그 대참사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 입맛 재료 찾아 삼만리

주세페 주방장과 아내 마리아의 모습. 박찬일 제공
나는 간혹 지진의 충격에 흔들리곤 했다. 이상하게도 지진은 꼭 밤에만 왔다. 침대에서 떨어지거나, 지진에 놀라 학교에서 대피하는 초등학생이 되어 복도를 줄달음치는 꿈을 꾸면 영락없이 ‘무언가’가 있었던 거다. 다음날, 식당에 출근하면 ‘테레모토’(지진)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이다. 부주방장 페페는 전날 밤의 지진을 아주 실감나게 증언(?)했다. 그는 지진에 의해 흔들리던 책상이나 침대 따위의 모습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입을 내밀고 얼굴을 좌우로 흔들면서 푸르르, 하는 소리를 냈는데 이건 ‘정말 괴로워’하는 제스처이자, 흔들리는 탁자를 생생하게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그 녀석 옆에 있으면 당장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온몸이 으스스해졌다. 페페는 자칭 지진예보관이었다. 식당 밖 공터에 쥐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면 그는 ‘흠, 또 지진이 날 모양이구먼’ 해서 사람들을 떨게 만들었다. 중세 사람처럼 그는 자연현상으로 종종 점을 쳤던 셈이다. 그가 스파게티 한 봉지를 뜯어 마지막 남은 스파게티가 딱 1인분에 맞게 떨어지면 그는 다음날 대박이 난다고 예언했다. 그게 맞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칠리아는 늘 엄청난 지진이 일어나는 터키와 이란 지역과 같은 지구대에 속해 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다시 일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시칠리아인이 사뭇 존경스럽지 않을쏘냐. 그네들의 낙천적인 태도도 아마 이런 자연조건에서 온 것일 테다.

지진 소동을 겪으며 반시칠리아인이 되어 가는 것 같아도, 밥 문제는 늘 나를 괴롭혔다. 기름진 음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양 음식이라 늘 니글니글하고 속이 불편했다. 고추장불고기나 매운 닭발 같은 게 먹고 싶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서울에서 친구 요리사인 윤정진이 부쳐준 고추장은 있지만 이걸로 해갈이 될 리 없었다. 시장에서 푸른 고추가 눈에 들어왔다. 아 글쎄, 상인 말씀이 “피칸테!”란다. 맵다는 뜻이다. 이게 웬 떡이람.

그러나 우리처럼 사철 매운 고추가 나는 게 아니라, 8~9월에만 반짝 푸른 고추가 등장한다. 이것도 잘 사야 한다. 어떤 건 전혀 맵지 않고 피망처럼 달콤하기 때문이다. 매운 건 정말 정신이 확 깨게 매운데 이걸 사서 장아찌를 담글 요량이었다. 어림짐작으로 물에 소금을 풀고 고추를 담갔다. 그러나 보름이 가도, 한 달이 가도 고추는 생오이처럼 아삭아삭하기만 할 뿐, 좀체 절여질 낌새가 없었다.

시칠리아 고추는 과육이 매우 단단한데다, 그저 소금물에 담가 두었으니 절여질 리 만무했다. 고추에 소금을 잔뜩 뿌려서 절여야 한다는 걸 천생 책상물림이던 내가 알 리 없었던 거다. 결국 서울의 어머니에게 국제전화로 에스오에스를 치고 나서야 매운 고추 맛을 볼 수 있었다.

고추뿐 아니다. 한국 식재료라고 할 만한 건 뭐든 혈안이 되어 찾는 습성이 생긴다. 초고추장은 없지만, 종종 회 맛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생참치야 널려 있고, 값도 쌌다. 심지어 최고의 횟감으로 치는 가마살(머리 아래쪽의 기름진 배 부위)이 굵은 가시가 있다고 보통 대충 잘라 버리기도 하는 걸 공짜로 얻는 행운도 있었다. 참치를 부위별로 해체하지 않는 이탈리아는 한국 ‘회꾼’들에겐 천국이다. 대충 뱃살만 잘라 달라고 해도 똑같은 가격이다. 오히려 ‘뭐에 쓰려고 그래?’ 하고 황당한 시선을 받게 된다. 뭐, 대충 설명하시라. 날로 먹는다는 얘기 대신, “미 피아체 스시”(난 스시를 좋아하거든) 하면 다 알아듣는다. 슬프게도 이탈리아 사람들은 한국인도 스시만 먹고 사는 사람으로 안다. 도미도 먹음직스러운 자연산이 아주 싸다.

한국선 금값 삼겹살·갈비 여기서는 똥값이네

정육점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한국에선 제주에서나 맛볼 수 있는 기막힌 맛의 말고기도 쉽게 구한다. 말고기는 원래 이탈리아와 프랑스 같은 데서 즐기는데, 한창 광우병이 돌던 10여년 전에는 더 흔했다. 말고기는 질길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입에 넣으면 그냥 스르륵 녹아 버릴 정도다. 부드럽다고 하는 소 안심은 저리가라다. 다만 특유의 노린내가 있어서 문제지만 말이다.

정육점에서 한때 고기 즐기던 내가 가장 좋아한 건 돼지갈비나 소갈비였다. 우리나라나 귀하게 치지 이게 세계적으로 싼 부위다. 그네들 기준으로는 먹잘 게 없고 뼈가 많으니 살코기의 반값도 안 된다. 삼겹살 역시 마찬가지다. 이건 갈비보다 더 싸다. 갈비는 살코기 비슷한 대우는 받는데, 삼겹살은 그냥 ‘기름’이기 때문이다. 기름을 고기값 주고 사먹는 걸 그네들은 이해 못한다. 그래서 유럽산 삼겹살이 한국에 많이 들어온다.

다만, 이런 지천으로 널린 질 좋고 값싼 식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변변히 해먹어 볼 엄두는 쉽게 못 냈다. 하루 종일 식당에서 시달리고 뭔 힘으로 밥을 해먹을 수 있었을까. 주방장 주세페가 지르는 고함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로베르토오! 저 생선 언제 다 손질할 거야? 파스타는 다 밀었나? 뇨키 반죽은? 또또또…” 아, 좀 쉬면서 합시다. 주방장님!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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