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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서열’ 배틀넷…맞짱뜨는 쌈장들. 그래픽 홍종길 기자 jongge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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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쏙]
경쟁학교 물어뜯고 내 학교 치켜세우고키보드로 전쟁 벌이는 ‘캠퍼스 훌리건’ 그들은 “금기 까발리는 놀이”라 하지만
‘줄세우기 사회’의 씁쓸한 자화상일 뿐 애교심 하나만으로 맞붙는 치열한 전쟁터가 있다. 인터넷 세상에서 벌어지는 ‘키보드 워리어’(keyboard warrior)들의 모교 자랑 시합이다. 축구 경기장의 훌리건처럼 이들 키보드 전사들은 스스로 훌리건이라 부르며 다른 학교 누리꾼(네티즌)들과 승부를 벌인다. 무기는 오로지 입심과 자료. 상대의 자존심과 긍지를 가볍게 비웃어주며 ‘우리학교 최고’라는 문자 따발총을 쏴댄다. 모교는 홍보하고 경쟁 학교는 ‘악플’로 깎아내리는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은 젊은이들의 새 놀이문화로 진화하고 있다. 주무대는 인터넷 사이트 ‘훌리건 천국’(cafe.daum.net/posthoolis). 훌리건들이 벌이는 ‘애교심 배틀’이 장난이 아니라는 입소문이 번지면서 회원이 3만2000명을 넘어섰다. ‘디시 인사이드’ 등 유명 사이트 등에서도 종종 전투가 일어난다. 한번 시작하면 점점 혈압이 올라가는 경쟁심리에 한국 특유의 애교심이 합쳐져 탄생한 풍속도다. 이들은 학교 자랑을 ‘훌짓’(훌리건 행위)이라고 하면서 명예훼손과 실증적 분석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대학을 서열화하는 학벌주의, 그리고 이를 다시 뒤집어 비웃고 조롱하는 사이버 안티문화가 몇 겹으로 뒤얽힌 웃기면서도 씁쓸한 우리의 자화상이다. 물고 무는 정답없는 게임 훌리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대학 서열 매기기다. 어느 학교가 어떤 학교 앞에 오느냐는 정답 없는 게임으로 밤을 새운다. 처음에는 학교 비교에서 시작해 이제는 단과대와 학과별 비교로 세분화했다. 벌써 10여년째 이어지고 있는 서울대 공대·포항공대·카이스트의 비교 게임은 이미 고전이다. 포항공대와 카이스트는 서울공대가 간판뿐이라고 몰아가고, 서울공대파는 다른 학교들은 ‘오지’에 있다며 오랜 전통과 국립대란 점에서 서울공대가 우위에 있다고 맞받아치는 식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정말 애교 수준이다. 가장 치열한 싸움은 이른바 ‘인(in) 서울 중상위권 대학’을 놓고 벌어진다. 한 훌리건이 한양대, 중앙대, 경희대 상경계의 1993~2008년 공인회계사 합격자 수를 표로 만들어 올린다. 각각 순서대로 477명, 450명, 453명이다. 한양대를 자랑하는 글 같지만 다른 훌리건들은 ‘성훌’(성균관대 훌리건)이라고 비난한다. 표 아래 각주에 “성대의 경우 세 학교보다 월등히 높고, 시립·외국의 경우 세 학교보다 매우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어 제외하였음”이라고 써 있기 때문이다. 세 대학을 싸움 붙여 한양대 손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실은 성균관대를 자랑하는 전략이다.
그러면 다시 댓글이 붙는다. 공인회계사 수로 경영대 우열을 가리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서울대보다 연세대나 고려대가 공인회계사에 더 많이 붙는데 그렇다면 연세대와 고려대가 서울대보다 우월하다는 거냐.” 이어 훨씬 더 깊이 들어가는 반론이 제시된다. 검색 가능한 모든 인명정보를 뒤져 △경제학과 출신 상장사 임원 △금융인 출신 대학 순위를 매겨 중앙대가 한양대보다 앞선다고 주장한다. 각 대학 경영대학원이 교류하는 외국 대학들을 검색해 ‘서울대-듀크대, 중앙대-푸단대, 성균관대-MIT, 연세대-퍼듀대’라고 제시한 뒤 바로 중앙대가 교류하는 푸단대는 중국에서 칭화대와 베이징대에 이은 3위 대학이라고 떠벌린다. 교류 대학이 없는 한양대를 깎아내리려는 것이다. 5국대를 아시나요?-‘하나만 패기’ 연합작전 초기 훌리건들은 다른 대학을 비꼬는 별명을 만들어 놀려댔다. 고려대는 구려대, 성균관대는 병균관대, 중앙대는 중망대라고 부르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름 장난으론 수준 낮은 훌리건으로 치부된다. 대신 다른 대학들을 싸잡아 비하하는 열쇳말들을 개발한다. ‘5국대론’이 그 예다. 가장 처음에는 ‘3국대’에서 시작됐다. 학교 이름에 ‘나라 국’자가 들어가는 건국·단국·동국대를 싸잡아 촌스럽다고 공격하는 고전적 비유였다. 요즘에는 이들 세 대학에 ‘국’민대와 외‘국’어대를 집어넣어 ‘독수리 5국대’라고 갖다 붙인다. 한국외대와 경쟁한다고 여기는 성대, 한대, 중대 훌리건들의 연합작전이다. 물론 외대 훌리건들은 강하게 반격한다. 요즘 훌리건 천국에선 이미지가 괜찮은 외대를 향한 이런 공격이 잦다. 외대의 ‘약점’인 작은 캠퍼스를 물고 늘어진 유명한 에피소드가 ‘일감호 사건’이다. 한 누리꾼이 “외대는 학교가 작아 건국대 안에 있는 일감호(호수)에 빠진다”고 시비를 건다. 그러면 또다른 누리꾼이 ‘구글 어스’의 위성사진으로 직접 외대 서울 캠퍼스와 건대 일감호를 그래픽으로 오려내 실제 일감호에 외대 교정이 들어가는지 실증을 한다. 결론은 외대가 일감호보다 큰 것으로 나타났지만, 외대 훌리건들로선 다른 대학 호수보다 크다고 좋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학 홍보 논리 스스로 개발-대학들도 신경 안쓸 수 없어 출신 유명인사 숫자 세기 게임은 훌리건들이 벌이는 중요한 경기 종목이다. 캠퍼스 크기로 외대를 집단 공격하면 외대 훌리건들이 한국언론재단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언론인 출신교 순위에서 외대가 4위에 올랐다고 맞받아치는 식이다. 훌리건들은 이런 출신 인사를 ‘아웃풋’이라고 부른다. 한양대 훌리건이 1996~2005년 사법시험 합격자 수가 한대 441명, 성대 409명이라고 아웃풋을 비교하면, 성대 훌리건은 “더 정확한 비교를 하려면 법대 정원 대비 합격률이 중요하다”며 법대 총정원 대비 합격률은 성대가 23.1%로 한대의 18.1%를 앞섰다고 반격한다. 요즘에는 출신 인사 비교 종목이 훨씬 세밀해졌다. 대기업 임원 비교는 기본이고, 최근에는 한국은행 입사자 수, 대우증권 애널리스트 출신 학교 숫자 비교까지 등장했다. 이런 과정에서 모교들도 홍보에 도움을 얻기도 한다. 지난해 중앙대 홍보실은 한 중대 출신 훌리건한테서 ‘제보’를 받았다. 주요 포털사이트에서 출신 인사 검색을 하는데 70년대에 중앙대로 흡수된 서라벌예대 출신 인사들이 중대 출신으로 검색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중앙대는 인물데이터베이스 운영업체 쪽에 이를 고쳐달라고 요구했고, 덕분에 서정주·김동리·최인훈 등 서라벌예대 문창과 교수를 지낸 문학계의 거장들과 김주영·유현종·김원일·이문구·조세희·한승원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 400여명을 모두 중대 출신 인사로 검색되게 했다. 여타 훌리건들도 “대박을 쳤다”며 감탄했던 사례다. 대학배치 서열표가 원인-나름 10년을 넘긴 훌리건의 역사 학교 훌리건 문화의 연원은 예상보다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입시에서 지원학교를 고르기 위한 자료로 제공되던 ‘대학입시 배치표’가 훌리건을 배출한 뿌리다. 배치표에 나온 대학 순위가 맞냐 틀리냐로 입씨름을 벌이던 것이 시작이었다. 수험정보회사인 진학사의 인터넷 게시판에 수험생들이 몰려들면서 초기 훌리건들이 등장했다. 이어 지금은 사라진 포털 네띠앙의 ‘대배토’ 게시판을 거쳐, 2000년 포털사이트 다음에 훌리건 천국(cafe.daum.net/hoolis)이 개설됐다. 현재의 훌리건 천국은 2005년 카페가 문을 열었는데 초기 ‘(구)훌천’과 구분하기 위해 ‘신훌천’이라 일컬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 자랑의 가장 기본은 수능 등급이나 학력고사 점수 등 커트라인 점수를 따지는 것. 한 훌리건이 어느 대학 무슨 과가 경쟁 대학보다 예전에는 훨씬 커트라인이 높았다고 주장하면 바로 반격이 나온다. 대학 도서관에서 1970년대 신문에 나온 학력고사 입시결과표를 스캔받아 실제 결과를 보여주곤 한다. 반면 ‘돈 자랑’은 새로운 현상이다. 각 사립대학 결산공고 자료를 바탕으로, 건대 훌리건은 1위 성대, 2위 연대, 3위 건대라고 자랑을 늘어놓는 한편, 건대가 재단 자금총액 대비 전입금 비율은 4위, 전입금 수입은 5위, 산학협력단 전입금은 10위라고 공개했다. 이에 다른 대학 훌리건들은 “역시 건대는 ‘투자, 투자 또 투자의 건대’”라며 비꼰다. 홍보의 전사들이자 입시 상담까지-날로 커지는 영향력 훌리건들은 왜 이런 경쟁에 몰입할까? 대학 2학년생인 한 훌리건은 “내가 속한 학교의 장점을 충분히 알리는 게 좋고, 잘 몰랐던 사실들을 찾아내는 일이 재미있다”고 설명한다. “다들 생각은 하면서도 금기시하는 걸 솔직하게 까발리는 것도 재밌지 않은가. 학벌이나 서열화 조장한다는 비판도 나오는데 사실상 서열을 조장하는 건 기성사회다. 대학 배치표도 그렇고, 언론들도 대학 평가를 하고…. 훌리건 천국은 필요악이다. 한국 사회가 학벌사횐데. 그나마 훌리건들은 최소한의 규칙을 지키면서 자유롭게 논쟁을 하니까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실제 훌리건들은 심각한 시사토론도 벌인다. 훌리건 천국에선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박정희에 대한 평가’ 등 고전적인 논제로부터, ‘취업시장에서의 여성의 고뇌’ 같은 대학생들의 직접적인 고민거리, ‘문근영의 기부에 대한 지만원의 공격’ 같은 시사적 문제도 ‘훌짓’의 영역과 대상이다. 또한 지망하는 고교생들을 위한 입시 관련 상담에도 열성적이다. 여러 입시분석기관의 대학 배치표도 올리고 상담 코너도 운영 중이다. 입시 관련 자료도 풍부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경쟁 대학들에 대한 비방도 난무한다. 그래서 요즘 같은 입시철이면 각 대학들은 훌리건 천국에 귀를 쫑긋 세운다. 나름의 전문성을 갖춘 대학 평가글이 올라오기도 하지만 터무니없는 비방도 입소문을 타기 때문이다. 서울 한 대학의 홍보실장은 “훌리건 천국을 늘 관심있게 지켜보고 모니터링을 한다”며 “드러나게 의견 개진이나 활동을 할 수는 없지만, 학생들이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를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또한 잘못된 소문이나 비판에 대해서는 적절히 해명하고, 사실관계가 다른 비방은 삭제를 요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대학들은 훌리건 천국을 홍보의 장으로 적극 활용한다. 격렬한 토론을 통해 다양한 정보가 걸러지는 곳이다 보니, 훌리건 천국에서 검열을 거치면 일반인에게 설득력을 얻기가 수월하다고 보는 것이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한겨레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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