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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라디오 ‘주파수’가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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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쏙]
시사생방송 ‘가위질’ 없이 할말 받아줘치열한 경쟁탓 섭외도 출연도 ‘별따기’ 정치부 기자들이 유력 정치인 집에서 아침밥을 먹던 때가 있었다. 총재를 비롯한 고위 당직자들이 당을 좌지우지하던 3김 시절, 그들의 한마디를 듣기 위해 기자들은 이른 아침 희뿌연 어둠을 헤치고 총재나 사무총장, 원내총무 등의 집을 찾았다. 이른바 ‘아침 마와리’(마와리: ‘도는 것’이라는 뜻의 일본어)다. 정치인의 말이 유일한 소스였던 시절, ‘얘기 되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 기자들은 눈곱만 간신히 떼고 날마다 아침식사를 함께했다. 요즘 정치부 기자들도 ‘아침 마와리’를 돈다. 하지만 정치인 집의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각 방송사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홈페이지를 클릭한다. <한국방송> ‘안녕하십니까 민경욱입니다’, <문화방송> ‘손석희의 시선집중’, <에스비에스> ‘김민전의 SBS전망대’, <시비에스> ‘김현정의 뉴스쇼’,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 <불교방송> ‘김재원의 아침저널’ 등, 이들 프로그램의 홈페이지를 찾아 그날 출연한 정치인의 인터뷰 내용을 확인하는 게 하루의 시작이다. 요즘 각 당 중진급 의원들은 이른 아침 기자가 아닌 라디오 진행자를 만난다. 정치인은 현안에 대해 당의 입장, 혹은 자신의 생각을 10여분간 오롯이 전할 수 있고, 프로그램 제작자 편에선 “의원들은 현안에 밝은데다 새벽에도 인터뷰에 응해준다”는 현실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한 여당 의원은 “라디오는 출퇴근 시간대에 시민들이 많이 듣기 때문에 영향력이 크다”며 “내 목소리로 직접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했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여당의 핵심 당직자라는 점 외에도 직설 화법 덕에 라디오 연출자들 사이에서 ‘섭외 1순위’로 꼽힌다. 대답이 명쾌하고 가끔은 기삿거리까지 제공한다는 점에서 선호도가 높다. 한 연출자는 “홍 대표는 ‘질러주는 맛’이 있다”고 말했다. 경제 전문가로서 비교적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는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과 전직 장관으로서 ‘내공’이 있는 송민순·이용섭 민주당 의원 등도 ‘선호 정치인’으로 꼽힌다. 의원들의 라디오 출연이 잦아지면서, 같은 당에서 딴 목소리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지난 17일 홍준표 원내대표는 <문화방송>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종합부동산세 유지론을 폈으나, 같은 날 임태희 정책위의장은 <시비에스>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종부세 폐지론에 무게를 실었다. 라디오는 당내 계파간 싸움터로도 활용된다. 최근 이재오 전 최고위원을 ‘사냥개’에 빗대 논란을 빚은 권영세 한나라당 의원과 박근혜 전 대표의 ‘물밑 행보’를 비판한 공성진 한나라당 최고위원 등은 모두 본인이 직접 출연을 요청했다고 한다. 작심하고 던진 이들의 한마디는 다음날치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확대재생산된다.
시사프로그램이 자리잡으며, 방송사들의 경쟁은 치열해졌다. 2000년 <문화방송>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이 첫 선을 보이고 2003년 <한국방송> 제1라디오가 ‘시사전문채널’로 전환된 이후, 각 방송사들은 앞다퉈 시사프로그램을 신설했다. 요즘엔 아침 6시부터 9시 사이에 6개의 시사프로그램이 돌아간다. 한 연출자는 “예전에는 정치인은 출연시켜주면 고맙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요즘은 ‘동방신기’보다 섭외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의원들 사이에선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이 ‘당내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여당의 한 중진의원은 “예전엔 라디오에 출연하려면 당 정책위원회에 신고한 뒤 당의 ‘지침’을 받았지만, 최근엔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하다보니 그런 관행이 사라졌다”고 귀띔했다. 이래저래 ‘하고픈 말’이 많은 정치인과 ‘듣고픈 말’이 많은 라디오가 만나 여의도는 오늘도 ‘생방’중이다.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한겨레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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