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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26 18:46 수정 : 2008.11.28 15:36

이소룡 이미지는 끊임없이 재생한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쌍절곤을 휘두르는 권상우.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절대적 무술영웅에서 싱하형, 평화의 아이콘까지…이소룡은 어떻게 세계인들을 사로잡았나

무술이 경지에 이르면 도술이 된다고 했던가? 분신술에 둔갑술을 더하니, 과연 그가 언제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알 수가 없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대한민국 학교 전부 ‘족구’하라 그래!”라며 쌍절곤을 휘두르는 권상우,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도 눈부신 ‘기럭지’를 감추지 못하는 <킬빌>의 우마 서먼, “굴다리 밑으로 뛰어와라”고 소리치는 ‘디시 인사이드’의 싱하 형, 보험회사 광고에서 “싸대~”를 외치는 무술인…. 이 모든 게 그의 변신이다.

<킬빌>에서 우마 서먼이 입은 점프슈트는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이 입은 옷이다.
쌍절곤 들고 뛰어다니다 몸살나 아랫목행

1971년 <당산대형>으로 시작된 이소룡의 영화인생은 불과 다섯 편의 작품으로 막을 내렸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절대적인 카리스마는 수십년간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 온갖 반향을 만들어냈다. 모든 나라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소룡을 즐겼고, 각 시대들 또한 그를 섬겼다, 무시했다, 놀렸다 하며 자기들만의 이소룡 아이콘을 빚어냈다.

1970년대의 이소룡은 절대적인 무술 영웅이었다. 그 이전에도 홍콩이나 할리우드에 무술가들이 등장하는 액션 활극이 있었지만, 이소룡은 이 장르를 완전히 뒤바꾸어 버렸다. 절권도라는 실전형 무술이 보여주는 사실감에 “아비요~!”라는 괴조음과 결합한 비장한 허세는 동시대의 청년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한국에서도 소위 ‘이소룡 키드’라는 세대가 등장했다. 골목길에서 대충 걸친 트레이닝복 바지에 웃통을 벗어던지고 쌍절곤을 휘두르는 남학생들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는 가진 자와 힘센 자에게 억눌린 그 시대의 청춘들이 이소룡을 통해 폭압에 맞설 용기를 얻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소룡의 요절 이후, 1980년대에는 여기저기서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무술 스타들이 튀어나왔다. 홍콩에서는 <오복성>, <프로젝트 A> 등을 통해 홍금보, 성룡이 인기를 모았지만, 애크러배틱한 무술 코미디 스타일은 감히 대사형 이소룡에게 도전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할리우드에서는 랄프 마치오 주연의 <베스트 키드>(The Karate Kid)가 동양 무술을 통해 나약함을 떨쳐버리는 소년의 이야기로 3편까지 시리즈를 이어갔다. <맹룡과강>에서 이소룡과 콜로세움 격투 장면을 펼친 척 노리스는 <델타 포스> 등을 통해 ‘돌려차기로 시작해 돌려차기로 끝나는’ 미국판 무술영화들을 선보인다. 일본에서는 만화 <드래곤볼> <북두의권>, 비디오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등이 이소룡이 <용쟁호투>를 통해 만들어낸 종합격투대회의 개념을 이어받았다.

쌍절곤을 들고 뒷산 약수터를 뛰어다니던 고등학생들은 대체로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아랫목에 앓아누웠다. 우후죽순 솟아나오던 무술영화의 붐도 곧 사그라들고, 이소룡 키드들은 자신들이 열광했던 세계를 부끄러워하며 숨어들게 된다. 할리우드에서도 저예산 무술영화들은 레이건 시대의 낯뜨거운 패권주의적 유물로 재빨리 폐기된다.


디시인사이드에서 인기를 끌었던 싱하형. 한겨레자료사진
물론 1990년대의 비디오가게에서도 이소룡의 영화를 찾는 팬들은 꾸준히 있었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의 “촌스럽다”는 악담 속에서도, 아니 바로 그 악담 때문에 자신만의 마이너리티 영웅을 지키고 싶었던 거다. 이소룡은 이렇게 아궁이 밑바닥의 숯처럼 웅크린 채 서서히 몸을 덥혔다. 그리고 21세기 들어 무지갯빛 섬광의 스펙트럼으로 부활하고 있다.

성룡과 이연걸은 오랫동안 ‘이소룡의 후계’라는 명함을 들고 할리우드를 기웃거려 왔다. 그러나 홍콩의 ‘본좌’는 흔들림 없이 주성치였다. 홍콩 거주민들만이 정확히 공감할 수 있는 저예산 코미디를 이어오던 그를 국제적인 스타로 만든 데는 여러 전환의 계기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소림축구> <쿵푸 허슬>의 대외적 성공에는 본질적으로 이소룡 영화에 대한 향수와 그 국제성이 깔려 있다. 오직 이소룡을 닮았다는 이유로 캐스팅된 <소림축구>의 골키퍼, 길거리 걸인에게 산 무술 비법서를 보며 절대고수의 꿈을 꾸는 <쿵푸 허슬>의 주성치는 이소룡 키드의 깊은 곳을 건드리고 있다. 미래 에스에프인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무술 장면이나 우마 서먼이 <사망유희>의 노란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등장한 <킬빌>도 그에 대한 오마주다. 이제는 대놓고 이소룡을 숭배하는 게 메이저 문화가 되었다.

한 보험회사의 <정무문> 패러디 광고. 흥국쌍용화재 제공
비디오가게 마이너 스타에서 메이저 문화로 부활

그럼에도, 이 시대의 이소룡이 전설적 영웅의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뒤늦게 이소룡을 만난 세대들에게 그의 표정과 연기는 우스꽝스러운 과장으로 다가오기 쉽다. 디시인사이드의 잘림 방지용 사진으로 등장한 ‘싱하형’의 모습은 원래 <용쟁호투>에서 이소룡이 자신의 여동생을 죽인 악한을 처치하면서 회환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임팩트 강한 이미지는 패러디의 소재로 즐겨 등장한다. 보험회사 광고에 그의 영화 장면이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인다.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태어난 이소룡은 사실 철저한 중화 영웅이다. 그는 중국인들이 핍박받는 타이(당산대형), 일제 치하의 중국(정무문), 이탈리아(맹룡과강), 홍콩 인근(용쟁호투)에 혈혈단신으로 달려가 그들의 울분을 주먹으로 해결해 준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 그에게서 중화민족주의를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동유럽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도시 모스타르의 한 공원에는 황금빛 이소룡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지역은 오랜 인종분규로 고통을 받아 왔는데, 모든 인종과 민족들이 함께 추앙할 수 있는 존재로 이소룡을 택한 것이다. 이제 이소룡은 세계 평화의 아이콘이다.

이명석/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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