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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 0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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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한국의 사진가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작가 이정진의 사막과 고독
커다란 창이다.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창 안에는 마치 고화질 티브이 화면에서 보는 것 같은 세밀한 풍경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오랜만에 대지를 찾은 햇살에 감동하는 산자락과 그 산자락에 기대어 사는 이들의 붉은 지붕들이 보인다. 사진가 이정진(47)의 서울 종로구 구기동 작업실에서 만난 아름다운 풍광은 그의 사진들처럼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낯선 곳의 풍경인 양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뉴욕, 반영, 1989’, ‘미국 사막’, ‘윈드’, ‘탑’, ‘길 위에서’(사북탄광) 등. 피사체가 되었던 그곳을 어떤 용감한 여행객이 찾더라도 사진에서 드러난 형체들은 결코 볼 수 없다. 이유는 오로지 그 안에 담긴 것은 ‘풍경’이 아니라 ‘이정진’이기 때문이다.
카메라에 푹 빠졌던 공예과 학생
스무살 처음 카메라를 잡은 뒤 지금까지 그가 찾아다닌 것은 자신의 내면이었다. 그 내면은 복잡하고 때로 폭압적인 현대문명에 지치고 시달리는 우리들에게 뭉클한 흐느낌과 여명과 같은 용기를 준다. 그 긴 여정에 카메라는 훌륭한 동반자였다.
미대 공예학과 학생이었던 그는 도자기보다는 카메라에 폭 빠졌었다. 그에게 카메라는 “바깥에 있는 것을 재단해서 그것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도구”이자 “낯선 곳을 체험하는 즐거움을 주는 동적인 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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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 0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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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뿌리 깊은 나무>의 사진기자로 입사해서 밥벌이를 시작했지만 ‘어사인먼트’(일의 할당)를 받아 자신의 주관보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드러내야 하는 기자 일에 큰 회의를 느꼈다.
27살 시퍼런 어린 사진가는 사진집 <먼 섬 외딴집>(울릉도 알봉분지에 사는 심마니 채씨 노인 부부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집. 1987)을 발행하고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더 큰 세계에서 자신을 찾기 위해 바람처럼 떠난 여행길이었다. 3개월 뒤 그는 뉴욕의 가난한 예술가가 되었다. “뉴욕의 에너지와 자유로운 분위기, 공기에 먼저 반했고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겠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뉴욕대학교 사진과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그는 욕망과 열정에 충실한 청춘이었다. “뉴욕에서 작가로서 어떻게 성공할지, 사람들에게 나(내 작품)는 어떻게 보일까” 하고 고민하면서 갤러리의 큐레이터와 스승들을 찾아 뛰어다녔다. 랠프 깁슨, 조지 로저 같은 당대 사진대가들과 교류는 배움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해주었지만 사진가 ‘이정진’을 만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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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road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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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인화지 대신 한지를 이용한 새로운 사진작업을 시작했다. 형식을 파괴해서 더 자유로운 세계로 한발 내디뎠다. 긁으면 보풀보풀 종이 질감이 일어나는 한지에 리퀴드 라이트(Liquid Light)라는 감광유제를 발라 사진을 만들었다.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독창적인 사진 작업이다. 1991년부터 그는 사막을 한지에 ‘찍어 넣기’ 시작했다. “사막이란 공간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내면의 체험을 하게 하는 곳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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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A lonely cabin in a far Island 1987_1〉, 〈the american desert 1991 1-23〉, 〈Pagodas 98-03〉.(※ 사진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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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35살 결혼과 동시에 한국에 돌아와서는 ‘탑’을 찍기 시작했다. 눈이 많이 내린 수덕사에서 소박하게 생긴 삼층 석탑을 첫사랑처럼 만나버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가 만든 ‘탑’들은 빛바랜 역사가 그대로 묻어 있는 듯 노랗고 위아래로 대칭된 형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인간사 흥망성쇠의 슬픈 여운이 배어 있다.
내년 뉴욕 전시회 열고 다시 여행 시작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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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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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미향 기자 mh@hani.co.kr·작품 사진 이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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