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1.26 20:37
수정 : 2008.11.26 20:37
[매거진 esc] 여기자 K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
고백하건대, 나는 007이었다. 007…, 살인면허…, 아니 기사 도살자. 내가 취재 시작하면 이건 이래서 이야기가 안 되고 저건 이미 끝난 사건으로 밝혀졌다. 경찰서 출입할 때 한 10일 동안 “특이 사항 없음”으로 보고를 띄우니 팀장이 “네가 치안 담당이냐, 아무 일 없는 게 자랑이냐”라고 혼을 냈다. 어쩌겠나 나만 가면 경찰서도 조용해지는데…. 평화사절단을 할 걸 그랬나.
사람이 굶다 보면 아무거나 허겁지겁 먹듯이, 하루종일 기삿거리를 못 찾고 빈둥거리다 보면 아무 제보나 덥석 물게 된다. 등가죽이 뱃가죽에 붙을 만큼 기사에 굶주렸던 어느 날, 온갖 투자정보 광고 사이에 제보 메일이 끼여 들어왔다. 엄마마저 신문에서 딸 이름 찾기를 포기할 정도로 기사가 드문 기자에게도 제보의 단비를 내려주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발신자는 아이디 ‘핸섬맨’이었다. 당시 내 전자우편 아이디에는 “멋지다”로 해석할 수 있는 낱말이 있었는데 ‘핸섬맨’은 첫 문장부터 진짜 내가 멋진지 따져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만나서 기삿거리를 주겠다는 것이다. 양심은 현실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져, 대뜸 “후회할 일 없을 것”이라고 답 메일을 보냈다. 뼈다귀 보고 달리는 개처럼 내 이성은 마비돼 그가 누군지도 모른 채 약속을 잡았다.
만나기로 한 날 식당 앞에서 나는 그래도 사람인지라 머뭇거렸다. ‘핸섬맨이 화내면 어떻게 하지? 미안하다고 할까? 아니면 이 정도면 예쁘지라고 맞불을 놓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들어간 식당에서 ‘핸섬맨’을 보고 나는 미안해해야 할 사람은 나보다도 ‘핸섬맨’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그일 거라고 생각했다. 핸섬맨도 경악했지만 나도 좌절했다. 핸섬맨은 내 떡 진 머리가 거슬렸을 것이고 나는 핸섬맨의 앙상한 민소매 면티와 금목걸이의 ‘양아치 같은’ 조화를 참을 수 없었다. 하여간 우리는 그날 사건을, 너 코피 터지고 나 귀 물어뜯긴 정도의 쌍방 과실로 합의 보고 밥을 먹었다. 심히 ‘날라리스러운’ 패션 취향과는 사뭇 다르게 ‘핸섬맨’은 열혈 사회복지사였고 그가 알려준 어느 고아 소녀 이야기 덕분에 나는 생애 첫 번째, 그리고 그 후로 오랫동안 자취를 감춘, 사회면 머릿기사를 썼다. 그 후 나는 기삿거리가 없을 때마다 마치 맡겨놓은 보따리 내놓으라는 듯이 핸섬맨을 윽박질렀으나, 핸섬맨의 약발은 그때뿐이었다.
새 출입처에 온 지 두 달, 이곳 공직자들은 벌써 내 존재의 영향을 받아 열심히 일하는 거 같다. 기사 될까 해서 알아보면 벌써 다 해결해 놓았다. 기사 두세 마리 연쇄살해하고 나면 하루가 저문다. 그렇게 허기질 때면 뜬금없이, 8년 전 민소매 면티의 사나이 핸섬맨이 그립다. 나한테 기사 독촉을 당하다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버린 그는 지금도 쇠사슬 모양 금목걸이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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