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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무녀 김명례씨(왼쪽 두번째)와 가족이 지난달 23일 오후 전남 순천 덕암동 집에서 굿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씨의 남편 박운기씨, 사위 심재문씨, 딸 박선애씨. 순천/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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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고흥굿’ 발표회 여는 세습무 김명례씨 굿은 화해다. 굿판에선 삶과 죽음이 껴안고, 사람들끼리 울고 웃으며 용서한다. 김명례(68)씨는 이 굿판을 총연출하는 사제다. 신내림이 아니라 세습으로 가업을 이었다. 전라도에선 김씨같은 여자 무당을 당골이라고 부른다. 당골 집안은 세습됐고, 그들끼리 결혼했다. 당골 집안으로 시집간 김씨는 스물다섯살부터 굿판에 섰다. “굿·약·마음 다스림 ‘삼합’이 맞아야 병도 나아”타고난 목청 ‘인기’…20일간 밤새워 판 벌인 적도
김씨는 1976년부터 전남 고흥군 남양면을 돌며 활동해왔다. 당골이었던 시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그의 당골판이다. 예전 무당들은 이 당골판을 사고팔기도 했지만 김씨는 이 판을 떠나지 않았다. 주민들의 안녕을 빌고, 망자의 한을 풀며 결혼식, 환갑맞이 굿도 벌인다. 굿판에는 늘 남편 박운기(79)씨가 함께한다. 박씨는 장구와 징으로 굿판 음악을 책임진다. 이젠 딸과 사위 부부도 무당일을 이어가고 있다. 세습무인 김씨네 굿판에는 강신무에서 영험을 보이려 시연하는 작두타기나, 신내린 무녀의 입을 통해 나오는 ‘공수’(신내림말)는 없다. 대신 음악과 춤, 덕담으로 더욱 구성지게 판을 꾸민다. 1991년에는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여수 영당 풍어굿 시연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제 당골들은 하나둘 사라졌고, 남해안 용왕굿을 제대로 하는 무당은 김씨 말고는 찾기 어렵다고들 한다. 남들은 기피하는 이 전통의 가업을 온가족과 함께 이어가는 김씨를 전남 순천 자택에서 만났다. 김씨는 그동안 교수며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에 한번도 응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서였다. 그런 그가 최근 생각을 바꾼 것은 2남2녀 네 자식들의 격려 덕분이었다. 올 1월은 특히 그에게 뜻깊은 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는 11일 순천문예회관에서 굿발표회를 연다. 막바지 연습 중인 김씨는 ‘징한’ 토박이말로 무녀로 살아온 인생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어떻게 무당이 되신 건가요? “스무살 때 순천에서 고흥으로 시집갔어요. 시어머니가 당골이셨는데, 저는 처음엔 굿을 안 했어요. 그러다가 배는 고프고 도둑질은 못하고 결국 당골판을 받았어요. 마을마다 무당이 있어 다른 당골판에는 못 들어가요. 그런데 제 판은 마을이 작아서 빈집 밥통 같았어(웃음). 한 300호나 됐을까? 그땐 집에 뭔 일이 있으면 우릴 불러요. 애 낳아도 부르고 아파도 병원 안 가고 우리를 찾았으니까.” -설움도 크셨을 것 같습니다. “당골이라면 그 자식들까지 무시했어요. 애들이 상처 입을까봐 모두 순천으로 학교를 보냈어요. 젊디젊은 것들도 우리한테 ‘하소’(반말)를 해요. 내 동갑쟁이가 우리 영감한테 하대를 해서 ‘말 좀 삼가라’고 했더니, ‘부모들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니까 할 수 없다’고 합디다. 그래서 ‘내가 백정이나 하인도 아니고 아픈 사람 있으면 나으라고 비는 사람인디 왜 그렇게 말을 천하게 하냐’고 따졌어요. 그런 분함을 당해서 애들을 거기서 학교에 안 보냈지라.” 자신들은 세습으로 무당이 되었지만 세습무들은 자식들에게 무당 직업을 잇지 않았다. 이제 전남 지역 당골은 겨우 손으로 꼽을 정도다. 김씨도 그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김씨의 딸 박선애(46)씨는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무녀의 길을 걷고 있다. 딸 박씨는 처음엔 굿판과는 거리가 멀었다. 30대 때 신병이 찾아와 자살을 기도하는 등 시련을 겪더니 스스로 무당이 됐다. 시어머니도 강진 출신 큰무당이었으니 당연한 노릇처럼 보이기도 한다. 몸이 안 좋았던 박씨가 굿을 한 뒤로는 몸이 좋아졌다고 한다. 인터뷰에 동석한 박씨는 “할아버지 윗대부터 무업을 해와 그 피가 흘렀던 모양”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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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에게 배워 딸·사위에게 ‘세습무 맥잇기’ -굿을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던데요. “서러워요. 역부러(일부러) 울라는 것도 아니고. 굿에 따라 눈물이 나올 때가 있으면 많이 울어요. 눈물이 나와요. 나도 모르게. (굿이 끝나면) 나도 마음이 시원해져요. 또 울기만 한 것이 아니고, 앉아서 노는 순간 재담 한자리 하면 사람들이 자글자글 웃어요.” -예전보다 굿이 짧아졌죠? “그때는 저녁 7시 8시 되면 시작해 이튿날 아침까지 했지요. 골병이 들어부러요. 텔레비전도 없고 항께 굿 한다고 하면 다 왔어요. 쉬는 순간에 사람들이 창도 하고 재담도 하고. 죽은 사람 잔치, 산 사람 잔치여. 한번은 열흘을 굿 했더니 마지막에는 헛소리가 나옵디다.(웃음) 스무날까지 잠 안 자고 해봤어요.” -지금은 세습무 굿이 많이 변형됐다는 지적도 나오는데요. “세상에 따라서 변형이 된다고 봐요. 예전엔 사람이 죽으면 삼년 탈복했는데, 요즘은 삼우 탈상(삼우제)으로 끝나요. 법사들이 자기들 세상인께, 굿을 해야겄다 하면 나를 불러요. 보살들이 못하니까. 옛날식으로 하면 골병 들제. 또 (법사들과는) 굿 장단이 맞지도 안해.” 요즘은 굿판의 메커니즘이 변했다. 과거 당골들이 굿을 주재하던 것과 달리, 이젠 점쟁이들이 의뢰인들 요구에 따라 무녀들에게 연락해 굿팀을 짠다. 대도시에선 아파트나 주택에서 굿 하기가 어려워 굿만 전문으로 하는 ‘굿당’이 생겼다. 경기가 안좋으면 되레 굿 수요가 더 많아진다. 하지만 점쟁이와 법사가 굿판에 끼면서 굿이 정통에서 변형되고 있다. 전라도 굿도 굿거리 중간에 강신무가 신의 소리를 전달하는 공수가 첨가된 ‘짬뽕굿’이 대세다. -정통 세습 무당들은 점점 사라져 갑니다. “세습무들이 거의 없어요. 이대로 가면 강신무 굿으로 가불고 정통은 없어지제. 굿이 보존돼야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배워갖고 할라고 해야제? 나한테 ‘제자를 하나 심어 놓으쇼’ 그런 말을 많이 들어. 근디 내가 ‘내 굿 좀 배워서 해라’ 이런 말을 못하겄습디다. 우리 딸한테도 한 대목 한 대목 가르치진 못해요. 신칼을 들고 나서면 차근차근 말이 나온디, 가만히 앉아서 또박또박 가르칠라고 하면 어먼(다른) 말이 나와 딱 막혀요. 우리 딸한테도 ‘니가 배울라면 녹음해서 해라’ 이랬지요.” 김씨는 요즘 남편·딸·사위와 함께 11일 굿 발표회를 앞두고 연습을 한다. 당골임을 숨기고 싶었던 그가 굿 발표회를 열기까지 고민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딸 부부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이번 김씨의 발표회는 점차 사라져가는 세습무 굿을 보전하자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이번 고흥굿 발표회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생각조차 안 했지요. 그런데 자녀들이 그동안 고생했응께 발표 한번 하장께…. 그날은 인자 딸이랑 같이 가서 굿 해야제. 영감하고 나하고 죽어불면 굿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내 밑에서는 (딸하고 사위) 둘이가 (굿판에) 나왔어. 생각조차 안 했는디. 참 ‘뜬금네’가 나왔어.(웃음)”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나요? “못 배운 게 한이요. 어머니가 가슴앓이 병 들어 누워 학교는커녕 야학에도 못 가게 했어. 스무살 묵을 때까지 일만 하고. 시집와서도 꽤 고생했소. 나는 못 배운 것이 한이요. 너무나 부모 사랑을 못 받고, 고생한 거 생각하면 …. 내 속 아는 사람 암도 없어. 공부라도 배웠으면 자동차라도 한 대 빼 갖고, 가슴이 차올라 답답할 때면 어디라도 차를 몰고 갈텐데. 면허를 딸지 알아야 차를 몰제?” 순천/글ㆍ영상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한겨레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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