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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1.07 19:47 수정 : 2009.01.07 19:47

나지언의 싱글 라이프

[매거진 esc] 나지언의 싱글 라이프

몇 년 사이 달라진 거라곤 헤어스타일뿐인, 언제나 묵묵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서로 새해 계획을 말해 보기로 했다. “올해 난 살을 뺄래.” “그럼 그 계획 못 지키면 돈 내기.” “됐어. 그만둘래. 불가능해.” 현명해진 건지 비겁해진 건지 잘 모르겠으나 나이가 들어 바뀐 게 있다면, 나 자신과의 어려운 약속은 시작하지도 않는다는 거다. 이제 1월1일에 체중 감량이나 어학 실력 향상, 인문학 서적 100권 읽기 같은 걸 ‘올해의 계획’이라고 노트에 끼적거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

지키지도 못할 거라는 게 눈에 뻔히 보이자 친구들은 수치로 환산하거나 결과를 파악하기 힘든 방대하고 거대한 계획을 잡기 시작했다. 전 지구를 사랑하기, 과거에 집착하지 않기, 친구들을 진심으로 아껴주기, 철 좀 들기, 정신 차리기 등등. “진심으로 아껴준다는 건 30만원 상당의 선물을 한다는 걸 의미하지?” “올해 말에 정신 못 차렸으면 어떡할래?”와 같은 친구들의 말을 뒤로하고, 집에 와서 비장하게 새해 계획을 써보았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을 집필했을 때의 마음으로. 똑같은 줄무늬 티셔츠 그만 사기, 일주일에 2회 이상 고기 먹지 않기, 약속 시간에 10분 이상 늦지 않기, 아이크림 바르고 자기, 읽지도 않을 영어 소설 그만 사기, 내가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을까로 밤잠 설치지 않기 등등.

써놓고 보니 21세기의 지성인이 썼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쪼잔한 죄와 벌의 나열이다. 새해 계획은 점점 소심해지고 민망하리만큼 솔직해진다. 해내지 못했을 때의 실망감을 알고 미리 피하는 걸까? 아니,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들을 이제 적당히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 이 리스트는 ‘하지 말라’는 금욕과 ‘해내라’는 강요된 목표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직장인의 스트레스를 반영하는 것이다. 1억 모으기 같은 어려운 계획보다 나에게 중요한 건 기분이 우울할 때 산 티셔츠 한 장이라는 것, 크리스토프 바타유나 자크 데리다보다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와 나쓰메 소세키가 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아니까 말이다.

작성된 새해 계획을 곱씹어 볼수록, 어렸을 때 꿈꿨던 삶에서 얼마나 많이 멀어져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기회비용 측면에서 보더라도 도덕적이고 착한 목표들을 비켜 나가면서 각자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들을 자연스레 실천하는 게 더 ‘합리적’이겠다. 따라서 새해 계획은 우리가 뜨겁게 욕망하는 것들로 수정되어야 한다. 마음에 드는 줄무늬 셔츠 사기, 먹을 수 있을 때 고기 먹어 두기, 약속할 때 ‘5시’가 아니라 ‘5시쯤 보자’고 하기, 아이크림 선물 받기 등등. 이렇게 우리는 뭔가 거창한 계획을 세워야 할 것만 같은 부담스러운 새해 벽두를 그럴듯한 ‘대충주의’로 또 넘긴다.

나지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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