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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1.14 22:05 수정 : 2009.01.14 22:05

김도훈의 싱글 라이프

[매거진 esc] 김도훈의 싱글 라이프

여행의 날들은 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해외여행의 날들은 갔다. 가버렸다. 끝났다. 상황 완료다. 이 글을 쓰는 1월11일 일요일 현재 환율. 달러화는 1350원. 엔화는 1500원. 유로화는 1800원. 끔찍하다. 작년 5월 칸영화제로 출장을 갔을 때 유로화는 1400원대였다. 작년 늦여름 도쿄 여행을 떠났을 때 엔화는 950원대였다. 그 시절(이라고 하니 머나먼 이야기 같다)에는 만만한 환율 덕분에 식도락과 쇼핑여행을 겸하며 느긋하게 즐기는 게 가능했다.

침대에 누워서 가만히 그 시절을 뒤돌아보니 그것은 꿈이런가 싶어 눈물이 찔끔 났다. 기분을 좀 풀어보자며 명동으로 나갔더니 롯데 애비뉴엘 앞은 쇼핑백을 서너 개씩 든 일본인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지난여름 도쿄 아오야마에서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 시절의 나는 아오야마 편집매장 앞에서 ‘이래봐야 환율은 1000원이 안 되지롱’이라고 말하는 듯한 거만한 얼굴로 디자이너 쇼핑백들을 잔뜩 들고 의기양양하게 미소지었더랬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예전 블로그를 열었다. 작년 늦여름 이후, 혹은 초가을 직전. 광화문의 불꽃이 천천히 꺼지기 시작하고 주식도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하고 환율은 미친 듯이 오를 징조를 보이던 그때, 나는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뉴욕은 이상하게 한 번도 못 가봤다. 이번엔 꼭 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든다. 런던은 가도 가도 또 가고 싶다. 프로방스에서 느긋하게 날씨를 즐기며 쉬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타이에서 싸게 원없이 쉬고 싶은 욕망도 있군. 마일리지가 5만 마일이 넘으니 어디든 골라서 가야겠다.” 골라서 가긴 어딜 가. 동결된 월급과 오른 물가를 생각하면 집에 보일러 틀어놓고 가만히 누워 있는 것도 낭비나 마찬가지인 시댄데.

해외여행 금단 우울증 치료제가 필요해진 나는 2008년 최고의 책 중 하나였던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 산책>을 책장에서 꺼내 들었다. 고약하고 유쾌한 필치로 유럽을 능멸하는 여행작가 빌 브라이슨을 쫓아나섰다. <배트맨>의 잭 니컬슨과 똑같은 표정을 한 파리의 택시기사들에게 시달리고 해독 불가능한 음식을 내놓는 바이에른의 식당에서 탈출하자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포로수용소 기상 점호처럼 말하는 무뚝뚝한 사람들로 가득한 북부 독일과 가슴 미어지게 더러운 집시 애들로 가득한 피렌체를 벗어나자 속이 편안해졌다. 거봐. 여행 따위 할 게 못 된다니까.

책장을 덮는 순간 다시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빌 브라이슨의 퉁명스러운 여행기는 사실 여행에 대한 진정한 찬가라는 걸 말이다. 다시 치료제가 필요해진 나는 한겨레 도서 바자회에서 천원을 주고 산 <인간이 초대한 대형참사>를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첫번째 챕터가 채 지나기도 전에 필요한 문장이 나왔다. “2000년 7월에 발생한 에어프랑스 콩코드기 추락사고의 계기가 된 것은….” 비행기가 이륙할 때마다 마음으로 그리던 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몇년 전 비행기에 오르기 전 메모지에 긁적였던 유서가 떠올랐다. 그제야 나는 여행 금단 우울증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었다.

김도훈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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