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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1.14 22:41 수정 : 2009.01.18 10:33

지천에 깔린 고기와 와인, 여기가 학교야? 천국이야?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매거진 esc]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페셰, 카르네 뜻도 모르고 덤빈 이탈리아 요리학교
다국적 학생들의 야밤 번개 디스코 파티 그립구나

비행기를 갈아타고, 이탈리아 북부의 시골 요리학교에 어찌어찌 도착한 건 10년 전 초여름이었다. 그날 한숨도 못 잔 건, 시차보다도 내 인생을 ‘리셋’한다는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건 깨어난 그날 아침에 곧바로 수업이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요리모자를 멋들어지게 쓴 노익장 요리사 선생이 수업에 나섰다. 실습실에서는 묘한 냄새가 났다. 마늘과 생고기 냄새를 합쳐놓은 듯한, 거기에 (나중에 알게 되지만) 바질과 로즈메리, 타임 같은 허브 다발 냄새가 뒤섞인 기묘한 냄새였다. 실습실 탁자 바닥 틈에 고여 있는 동물의 피에서 헤모글로빈 냄새 같은 것도 났다.

점심·저녁 값만 계산해도 수업료 빠지네

이탈리아 요리라고는 가짜 미국식 피자나 말도 안 되는 일본식 파스타 가락이나 겨우 보았던 내게 오리지널 이탈리아 요리는 충격이었다. 파스타 한 그릇을 볶아도 엄청난 양의 올리브유를 팬에 따랐다. 한국에선 비싸서 당시 웬만한 고급 식당 아니면 구입하지도 않던 올리브유를 말이다. 또 올리브유라면 다 똑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한국과 달리, 지방별로 품종별로 가격대별로 수백 수천 종의 올리브유를 요리에 맞춰 쓰고 있었다. 토마토는 또 어떤가. 역시 수십 종의 토마토가 레시피마다 다르게 등장했다. 찰토마토와 방울토마토가 고작인 나라에서 온 나는 혼란스러웠다.

완전 100퍼센트 원어(?)인 요리 용어는 머리끝을 쥐어뜯고 싶었다. 페셰, 카르네, 에르베, 콘세르바지오네, 파스테 프레스케, 파스테 세케… 어어, 뭐야? 어쩌란 말이야? 아마도 내가 수없이 보아온 외국어 통역 중에 가장 센스가 뛰어났던 통역 선생이 따로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그 학교를 뛰쳐나와 버렸을 것이다.


앞의 요상한 이탈리아어를 순서대로 해석하면 생선, 고기, 허브, 저장, 생 파스타, 건조 파스타였다. 이탈리아 요리가 한국에는 사실상 제대로 소개되지 않던 시절에 이런 말을 거의 들어볼 여지가 없었던 터라 난감할밖에. 그런대로 학교에서는 준비된 학생인 줄 알고 마구 밀어붙였던 거다. 학교를 뭐라 할 건 없었다. 뭐, 군대 간다고 각개전투나 사격술, 공수 훈련을 미리 연습하고 가지 않듯이. 다만, 와인 공부를 하지 않고 간 건 좀 실수였다. 요리에 웬 와인이 중요하지? 우리의 의문은 수업 시작과 함께 산산이 깨졌다. 거의 대부분의 요리에는 다종다양한 와인이 쓰였다. 와인을 모르면 요리도 잘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어쨌든 나는 첫 와인 수업 시간에 ‘와인이란 포도로 만든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아니, 와인은 됫병들이 소주와 포도, 설탕으로 만드는 거 아니었어?

수업은 아침 8시에 시작했다. 대학 시절에도 1교시는 아예 시간표에 넣지 않았던 내가 꼭두새벽(?) 수업을 억지로 들어야 했다. 빵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새벽조에 걸리면 그야말로 눈곱 뗄 시간도 없이 밀가루를 주물렀다. 저녁 6시가 되어야 수업은 끝났고,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저녁을 만들고 서빙하며, 먹는 일도 모두 수업의 연장이었으니 해가 져야 하루가 끝나는 농부 같은 삶이 시작됐다.

당시 농담으로, 학교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한국의 이탈리아 식당에서 먹는 가격으로 환산해 본 적이 있다. 애피타이저 두 가지 2만원, 파스타 2만원, 메인요리류 3만원, 디저트 1만원, 커피 5000원, 와인 2만원=10만5000원. 매일 점심과 저녁을 이렇게 먹었으니 학비가 아깝지는 않았다. 단, 이 음식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에 한해서 그렇지만.

확실히 스케일이 달랐다. 당시 한국에서 비싼 가격 때문에 미국산 짝퉁을 쓰던 파르메산 치즈가 지천으로 널렸고(몇 킬로그램쯤 냉장고에서 슬쩍해도 알 턱이 없는), 고급 호텔에서 생색내며 주는 송아지고기도 갈고리에 걸려 저장고 귀퉁이에 대충 걸려 있었다. 가져다 파티를 해도 모를 만큼.(고백하건대 실제로 몇 번 슬쩍했던 것 같기도 하다.)

커피를 유달리 좋아했던 나는 천국을 만난 것 같았다. 당시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려면 사간동의 프랑스문화원까지 가던 때였다. 싸구려 플라스틱 기계로 뽑는 흉내만 낸 에스프레소였지만, 그만한 데도 없었다. 시중의 호텔에 가서 에스프레소를 시키면 종업원이 못 알아듣거나, “손님, 아주 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하고 물어보던 때였으니까 말이다. 학교 복도에 기계가 놓여 있어 마음껏 에스프레소(이건 천국의 음료였다)를 뽑아 마실 수 있었다. 어떤 날은 하도 많이 마시는 바람에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와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후회가 마구 밀려온다. 학교에서 식사시간에 주는 레드와인을 우리는 “맛없다”고 타박하며 무시하곤 했다. 이게 한국에 오면 식당에서 5만원은 너끈히 받는 와인이란 걸 그때는 몰랐으니까. 게다가 학교가 있는 피에몬테 지역은 최고급 와인이 무수히 나오는 지역이었다. 요즘 이 지역 와인은 엄청나게 값이 뛰었지만, 그 시절만 해도 살 만한 값이었다. 상상해 보라. 5만원짜리 와인이 그냥 상자째 식당 구석에 놓여 있고, 마시고 싶은 만큼 알아서 가져가 마시면 된다. 이건 와인 애호가라면 천국이다. 한국에서 수십만원 하는 바롤로 같은 고급 와인도 마구 협찬이 들어와 복도에 굴러다닐 지경이었다.

공짜였던 그 고급 와인들을 왜 안 먹었을까

커피를 빼면 입 짧은 내게 서양 음식은 고통이었다. 토마토 파스타가 웬수 같고, 송아지 갈비구이도 쳐다보기도 싫었다. 얼큰한 육개장이라도 한 그릇 하면 개운할 텐데 말이다. 대개의 남자들은 두어 달이 지나야 이탈리아 음식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반면 여자들은 오일과 버터로 범벅이 된 이 나라 음식을 물 만난 고기처럼 반가워했다. 내가 느낀 건, 확실히 여자들은 환경에 잘 적응한다는 사실이었다. 한두 달이 지나면서 얼굴에 살이 오르고 윤택해지는 건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하긴, 여학교 점심시간을 직접 보면 여자들이 연약하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이 요리학교는 이름조차 ‘외국인을 위한’이라고 수사가 붙어 있었다. 정체불명의 이탈리아인 학생들이 간혹 섞여 있기는 했지만. 한국·일본·미국·독일·브라질·니카라과·레바논… 온갖 국적의 아수라장이었다. 뭐, 거의 미니 유엔이었으니까. 애들 국적 익히다가 몇 달이 훌쩍 지나갈 판이었다.

국적도 다양한 쉰명가량의 학생들을 시골 기숙사에 처넣었으니 뭔 일이 일어나도 크게 날 분위기였다. 그걸 풀어준 건 놀기 좋아하는 이탈리아 녀석과 아일랜드계 미국인, 한국인이었다. 화단 블록을 뜯어내어 마당에 바비큐 화덕을 급조하고 고기를 구웠다. 아싸! 춤추기 좋아하는 녀석들은 좀 많으냐. 일본 애들까지 끼어 어디선가 빌려온 카세트테이프리코더를 확성기처럼 틀어놓고 촌스런 디스코 파티를 벌였다. 학교 주방에서 훔쳐온 마늘과 파로 양념한 불고기가 등장하는가 하면, 맨해튼의 최고급 식당에서 일하던 아일랜드계 미국인 윌리엄이란 친구는 그 무지막지하게 큰 손으로 바비큐 양념 갈비를 맛깔스럽게 쟀다. 일본인 켄은 혼자 외로울 때 먹으려고 몰래 숨겨놓은 우메보시(매실 장아찌)를 꺼냈다. 아마도 내 비장의 고추장과 멸치도 싸구려 와인의 안주로 작살이 났을 것이다. 그까짓 우메보시나 고추장, 멸치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 남자 독자들은 딱 군대 시절을 떠올리시면 된다. ‘사제’ 반찬이라면 제대 날짜와도 맞바꾼다고 하지 않았던가.

연기는 자욱해지고, 음악은 비트가 절묘하게 배합된 레게였다. 애들이 알맞게 흐느적거리며 쿵쾅거리니 방에서 눈치만 살살 보던 여자애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어떤 라틴계 아가씨는 아예 등짝을 몽땅 드러낸 뉴욕 스타일의 검정 파티복까지 척하니 입고 손가락에 맥주병을 끼고 흔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프리마돈나는 애들을 부른다. 낮에 배운 파스타 이름을 머리 쥐어 싸매고 외우던 범생이들(그래 봤자 쉰명 중에 두엇밖에 안 되는)까지 꼬여 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난리 브루스’가 터진 거였다.

얼치기 요리사들의 난리브루스에 이탈리아 경찰도 두 손 들어

그렇게 먹고 마시는 건 좋은데 카세트리코더가 처절하게 최고 출력으로 울부짖으면 사달이 났다. 그 깡촌 마을에 번쩍번쩍, 경광등을 돌리며 경찰 순찰차가 나타났다. 최루탄을 쏘고, 진압봉을 휘두르며, 물대포를 펑펑 쏴서 진압하고 싶었겠지만 그 미치광이 같은 얼치기 요리사 집단을 보는 순간, 어이없어지는 게 순서였나 보다.

“라가치! 바스타, 바스타!”(얘들아, 이젠 됐으니 그만하렴!)

정체불명의 학생인, 이탈리아 국적의 애가 등이 떠밀려 나서서 변명과 하소연을 했다.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고, 딱 하루만 놀고 그만두겠노라고. 경찰이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가면 그예 새벽까지 파티는 이어졌다. 일찍 곯아떨어지는 거대한 체구의 미국인 녀석이 창문으로 고개를 쑥 빼고 “잠 좀 자자!”고 고함을 지를 때까지.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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