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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길을 만나면 걸음은 절로 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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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남희의 시코쿠 도보여행 ③
인도 여행 중 만난 친구의 깜짝선물에 물집의 고통이 기적처럼 줄어들었네
지금 이 순간, 이 길의 어딘가를 걷고 있을 순례자들을 떠올려 본다. 저마다의 슬픔을 등에 지고, 채 나누지 못한 사연을 품은 채 걷고 있을 사람들. 그들은 왜 집을 떠나 1200킬로미터를 혼자 걷고 있는 걸까. 수많은 순례자들의 눈물과 웃음이 고스란히 번져 있는 천년의 길. 이토록 먼 여정에 오르게 만드는 이 길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건 우리가 길 위에서 걷고 있을 때만큼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기 때문이 아닐까.
다리 위에서도 들지 못했던 지팡이
길 위에서 우리는 아무런 가면도 쓰지 않는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을 들여다볼 뿐이다. 걷고 있을 때 우리는 머리를 쓰지 않는다. 찾아오는 모든 만남에 정직한 몸으로 반응할 뿐이다. 걷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평은 줄어든다. 가야 할 길이 험하고 고달플수록 감사할 일은 늘어난다. 눈은 밝아지고 마음은 담백해진다. 진짜와 가짜가 구별되고,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들이 보인다. 천년 전부터 오늘까지, 욕심도 없이 순하게 걷고 또 걸어 자기 자신이 되었던 익명의 순례자들. 그들이 지금 나를 붙잡아 주는 걸까. 지구 위에 이토록 영적인 길들이 있다니 고마울 뿐.
24번 절 호쓰미사키지(最御崎寺)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1시. 영혼의 충만함도 몸의 허기 앞에선 잠시 흔들린다. 길가에 떨어진 홍시를 주워 먹으며 옆의 밀감나무를 흘깃거린다. 한 달쯤 지나면 떨어진 밀감을 주워 먹으며 걸을 수 있으려나. 투명하도록 파란 하늘 아래 붉은 감들의 긴장이 쨍쨍하다. 들판에는 고개를 숙인 벼들. 가을의 절정은 단풍의 붉은빛이 아니라 여문 벼들로 출렁이는 저 황금빛으로 완성되는 게 아닐까. 세상에 아름다운 게 사무실에서 주식을 팔고 사는 이들의 고운 손이 아니라 벌판에서 묵묵히 일하는 농부들의 고단한 등인 것처럼. 고요히 차오르고 있는 가을 들판이 나를 위로한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왜 단명하는 걸까. 일찍 저물고 가뭇없이 사라진다. 그렇기에 길 위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오래 들여다보아야 한다.
걸음을 멈추고 오래 들여다보기, 좀 심하게 하고 있다. 삼십 분마다 물집과 눈 맞추기를 하고 있으니. 곪아서 피 흘리는 새끼발가락 하나가 몸 전체의 균형을 깨고 있다. 발가락에 힘을 주지 않으려다 보니 저절로 뒤꿈치에 힘이 들어간다. 그 결과, 발바닥 전체가 몹시 쓰리다. 그렇게 깨어진 몸의 균형이 마음의 균형마저 흔들고 있고. 순례자들이 ‘홍법대사’로 여기고 애지중지하는 지팡이를 나는 몸을 의지하는 도구로 쓰고 있다.
순례자들에게는 지켜야 할 몇 가지 전통이 있다. 그중 하나는 다리 위를 걸을 때면 지팡이를 땅에서 떼야 한다는 것. 그 옛날, 홍법대사님이 머물 곳을 구하지 못해 다리 밑에서 하룻밤을 지샌 적이 있다. 그 이후 순례자들이 다리를 건널 때면 혹여 지팡이 소리로 잠든 대사님의 영혼을 깨울까 싶어 지팡이를 들고 건넌다. 나는 오늘 다리를 건널 때마저도 지팡이를 들지 못하고 있다. 아침에 만났던 순례자들은 앞서 간 지가 오래고, 낯익은 이들과도 다시 만나기 어려울 만큼 뒤처져 버렸다. 괜찮아. 지금은 그냥 견디는 거야. 달팽이의 속도로 걷는 일, 처음도 아니잖아. 이 새끼발가락의 물집은 오늘이 절정인 거야. 그러니까 오늘만 지나면 고통도 줄어들 거야. 아무 효과도 없는 자기암시.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뒤돌아본다.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을 뿐이다. 이제는 환청까지 들리는 상태가 됐군. 절뚝거리며 발을 옮기는데 다시 무슨 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니 여전히 그 오토바이다. 오토바이 위에는 미동도 않고 있는 헬멧 쓴 남자. “앗, 헨타이(변태)다!” 영화나 책에서 보던 그 유명한 일본의 변태 아저씨. 얼마 전에 밤을 새우며 읽었던 미야베 미유키의 추리소설 <모방범>이 떠오른다. 취미로 살인을 일삼던 주인공들, 겉으로는 너무나 멀쩡해 보이는 남자들이었지. 며칠 전 길가의 수배자 명단에서 본 ‘영국인 여성 살해 용의자’의 얼굴도 떠오른다. 치매 수준의 내 기억력이 이렇게 엉뚱한 순간이면 쓸데없는 능력을 발휘한다. 증폭되는 상상력과 더불어 상승하는 공포지수. 저 남자가 쫓아오면 난 뛸 수도 없는 상태인데, 어떻게 하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헬멧을 쓴 변태가 말을 건다. “남희!” 이건 내 이름인데… 도대체 내 이름을 어떻게 안 거지? 겁을 먹은 채로 뒤돌아본다. 오토바이에 앉아 웃고 있는 변태는 놀랍게도 내 친구 히데키. “히데키? 너, 정말 히데키 맞아?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믿기지가 않는다. 오사카에 있어야 할 이 남자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말했잖아. 착한 아이라면 선물을 받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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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번째 절 고노미네지의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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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를 타고 6년 동안 세계일주를 한 히데키. 그는 시코쿠 순례길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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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집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잠시 부처님께 간구하고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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