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02.02 20:43 수정 : 2009.02.02 20:43

도시에서 살 때도, 지금도 나의 냉장고는 늘 먹을거리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지만 도시에서 살 때는 냉장고가 가득 차 있어도 막상 뭘 해먹으려면 해먹을 만한 건 어찌 그리도 없던지…. 당장 먹을 것도 아니면서 1+1이라는 말에 혹해, 물건보다 사은품에 혹해 집어온 것들이 많다 보니 냉장고는 늘 꽉 차있어도 막상 먹을 건 없는 부익부 빈익빈의 악순환이었다.

거기에 평소엔 순한 양이다가도 배가 고프면 하이에나로 돌변하는 남편과 한창 자랄 때라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픈 아들 녀석은 왜 꼭 마트만 가면 배가 고파지는 건지…. 결국 푸드코트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이것저것 사먹고 돌아오면, 그날 마트에서 장봐온 것들은 또다시 냉장고 행일 수밖에. 그러다 보니 무르거나 유통기한이 지나 먹어보지도 못하고 버려지는 것 또한 태반이었다. 이사를 오고 나서도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오히려 마트가 멀다 보니 예전처럼 자주 못 오니까 한번 왔을 때 많이 사야 한다는 생각에 냉장고 한 대를 더 구입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심각하게 고려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텃밭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그런 고민은 곧 해결되었다. 마트를 가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그날 먹을 만큼만 바로바로 수확해 먹다 보니 냉장고 안에서 야채들이 썩고 무르고 할 새가 없었다. 내가 직접 가꾼 것들이다 보니 아까워서라도 썩힐 수가 없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이 아닌, 밥상 위가 그대로 푸른 초원이 되었다. 상추, 고추, 토마토, 가지, 호박, 감자, 고구마에 이어 배추, 무까지 텃밭에서 가꾸어 먹을 수 있는 건 무궁무진했다.

그러다 텃밭 수확도 끝나고, 겨울이 되니 아, 이젠 뭘 먹고 사나 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트에 가서 뭘 사다 채워넣어야 할지 보려고 냉장고를 열었다. 헌데, 이게 웬일? 분명 먹을 만한 게 없어야 하는데, 해먹을 게 너무 많은 것이다. 볕 좋은 가을에 말려놓은 가지, 고구마순, 호박고지, 삶아 얼려놓은 우거지, 말린 시래기, 쪄서 냉동시켜 놓은 옥수수…. 이웃들 하는 것 보고 따라 늦부지런 떨다 보니 나도 모르게 쟁여진 것들이었다. 거기다 다용도실엔 벽난로에 구워먹을 호박고구마까지 한 박스 남아 있었으니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다.

그런데 우리집 남자들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난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데, 이 두 남자는 보고만 있는 걸로는 배가 안 차 우거지로 된장국 끓이고, 가지나물 볶고, 생선 한 토막이라도 구워 먹여 놓아야만 그제야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지으니 말이다.

오늘도 난 늙은 호박 한 덩이 앞에 놓고 호박죽을 끓일까, 전을 부쳐먹을까, 떡에 넣어 먹을까 고민중이다. 이 정도면 늦바람만 무서운 게 아니라 늦부지런도 무서운 거 아닌가?

이경미/ 드라마 작가

광고

관련정보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