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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싱글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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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도훈의 싱글 라이프
톰 스튜어트의 메일을 받았다. 톰은 영국에서 잠깐 살던 시절의 하우스메이트 중 한 명이다. 셰익스피어 극단 배우 같은 이름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톰은 내가 일하던 특수교육 학교에서 가정관리 부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밤에는 대마초를 운반 판매하는 스물여섯의 반놈팡이였다. 그는 그렇게 번 돈을 70년대 모델의 중고 베엠베(BMW)를 충동구매하거나 클럽에서 만난 값싸 보이는 여자애들과의 데이트 비용으로 모조리 날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톰은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우울증 약을 일주일에 서너 번 먹었다. 약을 먹고 나면 파란 눈동자가 탁 풀려서 멍청해 보이는 얼굴이 더 멍청해 보였다. 그와 내가 꽤 괜찮은 하우스메이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톰 스튜어트는 극동에서 날아와 궂은일을 하고 있는 나를 신심으로 존경했다. 가끔 나는 톰이 달라이 라마와 나를 혼동하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둘째, 나는 썩 괜찮은 요리사였다. 영국 젊은 애들은 세상에 ‘요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내가 칠리 고추를 넣은 베이컨볶음밥 따위를 만들면 세 명의 하우스메이트는 나를 제이미 올리버 보듯 했다. 톰이 특히 그랬다. 나는 싸구려 케밥이나 차가운 샌드위치로 연명하던 그가 가엾어진 나머지 항상 넉넉하게 음식을 만들었다. 톰은 내가 만든 밥을 먹다가 울음을 터뜨린 적도 있다. 밥이 너무 맛있어서는 아니었을 게다. 그런 톰에게서 몇 년 만에 메일이 왔다. “형제, 진짜 중요한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여자친구가 내 아이를 가졌어. 무서워서 바지에 똥을 쌀 거 같아.” 멍청한 녀석이 결국 실수를 저질렀구나. 두어달 뒤 두번째 메일이 왔다. “여자애래. 이름은 한나 스튜어트라고 할 거야. 바지에 똥 쌀 시간이라니까. 몸이 덜덜덜 떨려.” 톰은 좋은 친구였지만 좋은 아빠가 될 위인은 아니었다. 여자친구와 애를 버리고 어디론가 도망갈 게 틀림없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세번째 메일이 도착했다. “약도 끊었고 8년간 의절했던 엄마와도 화해했어. 직장도 새로 옮길 생각인데 별건 아니야. 아직도 바지에 똥을 쌀 것 같긴 해.” 나는 바지에 똥을 쌀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지구인 중에서 가장 무책임한 놈팡이가 애와 애엄마를 버리고 도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오줌을 지릴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너절한 놈팡이들에게도 희망을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그래도 걱정이 된 나는 공손한 문체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스튜어트씨, 당신이 가장의 책임감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한없는 축하의 마음을 보내옵니다. 덧붙일 말이 있습니다. 애와 애엄마를 버리고 도망을 칠 시 꼭 한국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제가 소유한 가장 값비싼 캐시미어 머플러로 곱게 목을 졸라 죽여드리겠습니다.” 김도훈 〈씨네21〉 기자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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