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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2.04 19:37 수정 : 2009.02.08 13:52

막장 요리사 얼떨결에 축구선수 되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윤재

[매거진 esc]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지중해 여름을 불태우던 청춘남녀들의 상열지사,
골키퍼로 이탈리아 공식 경기에 이름 올린 사연

이탈리아 북쪽, 알프스 밑의 요리학교에는 다국적 유엔군처럼 요리사들이 바글거렸다. 북유럽과 독일, 이탈리아에다 아시아 각국이 모였다. 아메리카 대륙은 캐나다부터 남쪽의 브라질까지 빠짐없이 여권 구경을 했다. 혈기 방장한 젊은 녀석들을 두 달간 꼼짝없이 기숙사에 처박아 두었으니 대소동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직업이 직업인지라 꼴통 기질도 대단했다. 다행히 어떤 녀석들처럼 칼부림 소동은 없었고, 다들 씩씩 웃으며 그 여름의 이탈리아를 즐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녀석들 중에 1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선수’들이 즐비했다. 테러분자로 오인받아 입국이 보류되어 뒤늦게 합류한 레바논 녀석은 험악한 생김새와 달리 심성이 착했다. 수업시간이면 조용히 사라져 모자란 잠을 청하느라 아예 별명이 ‘어디 있니’(where are you?)였던 걸 빼면 말이다.

금발머리 그녀는 피자집 며느리가 됐을까

미국 친구들이 꽤 많았는데, 실력도 좋았고 진짜 프로페셔널 칼잡이 냄새를 풍겼다. 비싼 돈 내고 와서 뭘 좀 배워 가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아마추어 느낌을 풀풀 풍기던 다른 나라 애들과는 사뭇 달랐다. 전쟁터 같은 미국 식당 동네를 벗어나 이탈리아에서 한적한 휴가를 즐긴다는 투였다. 특히나 이탈리아계가 많았는데, 할아버지 땅에 찾아온 ‘고향 방문단’ 같은 여유를 즐겼다.


청춘들을 모아두면 꼭 터지는 게 연애사고(?)다. 불행히도 난 기숙사 침대에 ‘가라리 네히어라’인 흐뭇한 정경을 직접 목도는 못했지만, 설사 그런 일이 벌어져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탈리아의 여름밤은 아름답고, 청춘은 다들 불타지 않았냔 말이다.

기숙사 공동세탁기에 물이 잘 빠지는 팬티를 집어넣어 원성을 샀던 리자라는 이름의 미국인 아가씨 요리사가 스타트를 끊었다.(물론 내 전통의 독립문표 흰색 팬티도 붉게 물을 들여 놓았다. 내가 항의하자 그녀는 볼을 마치 팬티 색깔처럼 물들이며 사과했다.) 동네 피자집 ‘맛달레나’의 큰아들과 바람이 난 거다. 학교 앞 큰 나무가 우거진 숲에 그 녀석과 함께 있는 리자의 금발이 얼핏 비쳤다. 연애를 하면서 리자는 마치 새색시처럼 발그레하게 볼을 물들이고 다녔다. 듣기로는, 미국 여자들이 이탈리아나 스페인 남자들과의 정열적인 연애를 꿈꾼다더니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이름하여 ‘지중해 사랑’이라고나 할까. 곱슬곱슬한 검정 머리를 짧게 깎고, 조각 같은 몸매에 선글라스를 쓴 이탈리아 남자들은 남자인 내가 봐도 반할 구석이 있었으니까. 물론 피자집 큰아들 리오는 키가 작달막하고 배는 불뚝 나와서 매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말이다. 누군가 리자에게 걱정스레 “왜 리오가 좋으냐”고 묻자 리자는 행복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핸섬하잖아.”

어느 누구도 리자가 피자집 맛달레나의 큰며느리가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리오가 학생 전문이라는 소리가 들렸고, 그 금발의 리자가 맛달레나에 앉아 있는 광경이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맛달레나는 나폴리식이기는 하되, 따로 경쟁 가게가 없어 평화시대를 누리는 맛없는 피자가게였다. 마치 인디오 할머니같이 투박한 맛달레나 아줌마를 시어머니로 모시고 이탈리아어 한마디도 모르는 뉴욕 여자 리자가 이 시골 깡촌에서 시집살이를 한다?

리자가 리오랑 끝까지 잘 지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생각건대, 리자가 거기 남았다고 해도 꽤 어울릴 것 같기는 했다. 리자가 서툰 이탈리아어로 피자 주문을 받고 시집 식구들의 세탁물에 빨갛게 물을 들이는 사고를 치면서 시골 여자로 살아가는 것도 꽤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인생은 예상대로 되지 않으니까 재미있는 것 아니냐.

난 이탈리아로 떠나면서 할인마트에서 싸구려 축구화 한 켤레를 샀다. 축구의 나라에서 공도 좀 차면서 즐길 생각이었다. 요리학교 홈페이지에는 제법 그럴듯한 잔디구장이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축구화는 요리학교 밖에서는 한 번도 신을 일이 없었다. 노예처럼 무보수 막장 요리사로 구르는 주제에 축구는 이 나라에서조차 언감생심이었으니까.

알고 보니 잔디구장은 요리학교 소속이 아니었다. 시민들이 이용하는 구장이었다. 이 시골구석까지 라이트 시설과 관람석을 갖춘 잔디구장이 있다니. 축구 강국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이 동네 사람들도 이 구장을 홈으로 하여 정규 경기를 정기적으로 벌였다. 국가축구협회에 등재되는 공식 경기였다. 말하자면 조기축구였을 테지만, 경기 수준이나 관리 기준은 놀라울 정도였다. 마치 프로 경기처럼 연간 시즌을 치렀고, 모든 경기는 입장료를 받았다. 심지어 매점도 열려 맥주와 간단한 음식도 팔았다. 물론 최고의 에스프레소도 있었다. 당시 서울운동장 프로 경기에도 밀반입한 소주와 오징어를 사고팔던 시절이었으니 정말 이탈리아의 축구 문화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내가 여권까지 제출하며 이 이탈리아 축구협회 공식 경기에 이름을 올린 건 아주 우연이었다. 바캉스 시즌이었고, 이 마을 팀의 몇몇 선수들이 휴가를 떠나버렸다. 그렇다고 노인들을 충원할 수는 없었고, 마침 우리가 눈에 든 거였다. 워낙 공을 잘 차 ‘디에고’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아르헨티나 친구와 브라질 친구, 나와 몇몇의 미국인이 용병으로 이 마을 선수가 됐다.

나는 골키퍼가 됐다. 놀랍게도 프로 선수들이 쓰는 장갑과 무릎 보호대, 엉덩이가 제대로 누벼진 최고급의 골키퍼 전용 유니폼이 내 손에 들려졌다. 장갑이라고는 목장갑밖에 껴보지 못했던 내게 선수용 장갑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비에 젖은 공도 찰싹 달라붙는 선수용 장갑은 김병지 선수가 달리 거미손이 아니라 장갑 덕이라는 걸 깨우쳐 줬고,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슛을 막아내던 놀라운 다이빙 캐치도 엉덩이가 폭신한 전용 유니폼 때문이란 것도 말이다.

아마도 동네에서 생선가게나 정육점을 운영하며 주말 경기의 자원봉사자로 40년을 일했을 것 같은 할아버지 장내 아나운서의 선수 호명이 있었다. 루카! 피에트로! 마르코! … 파르크(박)! 짜잔! 가문의 영광이었다. 일찍이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떡실신시킨 헤딩슛을 박두익이 날렸던 이후로 박씨가 이탈리아 축구경기에 언급된 게 처음 아니었을까.

눈동자에 모기 물려 봤수?

눈부신 라이트를 켜고 융단 같은 잔디를 밟는 야간경기였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왜 이 팀의 주전 네댓명이 일제히 바캉스를 떠났는지 알 만했다. 웽~ 공기 맑고 물 맑은 땅이니 모기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나마 움직이는 필드 선수들은 좀 나았다. 거의 서 있어야 하는 나는 모기의 대공습에 지쳐 갔다. 눈동자까지 모기에 물린 건 아마도 짧지 않은 내 모기 헌혈사에 처음인 듯싶다. 나는 네 골인가를 헌납했고, 열 골이라도 좋으니 경기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아마 2002년 월드컵 때 경기장 의자를 뻥뻥 차던 이탈리아 감독처럼 얼굴을 붉히고 손을 모아 흔들며 “파르크!”를 외치던 우리 팀 감독도 그러했으리라.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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