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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번 절 진네인의 늙은 나무가 절의 품격을 드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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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남희의 시코쿠 도보여행 마지막회
1200킬로미터의 끝에서 다시 떠오르는 사람들
밤이다. 산사의 밤, 비가 내리고 있다. 나는 장지문을 열어놓고 마른 나무들이 물기를 빨아들이는 소리를 듣고 있다. 절간은 적막하다. 불빛도 없고, 사람의 숨결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무치는 것은 없다. 지금 여기, 나는 홀로 ‘외롭고, 높고, 쓸쓸’하기에.
이곳은 고야산 기슭의 작은 절이다. 1200킬로미터를 걸은 순례자들이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곳. 100여개의 절들에 둘러싸인 진언종의 성지인 이곳은 홍법대사가 입적한 곳이다. 푸른 이끼를 갑옷처럼 두른 늙은 삼나무들이 끝없이 늘어선 곳. 수백년 세월을 건너온 성성한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곳이다. 순례의 끝을 마무리하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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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싸인 아침 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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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심한 길치였던 그는 무사히 순례를 마쳤을까
이곳에 오기까지 꼭 50일이 걸렸다. 길은 삼천리. 풍경은 다채로웠다. 산과 바다와 들과 마을을 넘나드는 길. 길은 세상을 향해 곧게 뻗어 있기도 했고, 구불거리며 산 깊이 잦아들기도 했다. 바다를 곁에 두고 걷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빈 들판에 혼자 남겨지기도 했다. 두 시간을 걷고 같은 자리로 돌아온 적도 있었고, 새벽 산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고 멀어져 갔다. 나는 늘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받았다. 한 끼 더운밥이며 음료수 같은 것부터 진심 어린 애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헤어지는 일에는 여전히 미숙해 등을 보여야 할 시간이면 어쩔 줄 몰랐다. 한 사람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며칠을 걷기도 했다. 일본 전역의 도보여행길을 다 걸었다는 남자였다. 유난히 말이 짧았다. 한 남자의 뒷모습이 그토록 많은 말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뒷모습에 위로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겨우 알았다. 앞날이 심히 걱정되는 길치를 만나기도 했다. 하루 종일 빨간 화살표를 앞서 찾아가며 길을 이끈 덕분에 점심을 얻어먹었다. 살면서 나보다 더 심한 길치를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직도 그 남자가 제대로 걸었을지 마음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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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를 걸어 다시 1번 절에 도착한 순례자들이 본당에 참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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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에 여자들도 있었다. 혼자 노숙을 하며 걷던 마흔네살의 시미즈상. 결혼은 안 했지만 열여덟살 딸이 있는 미혼모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그녀. 마라톤과 산행을 즐기는 트럭운전사인 그녀와 마지막 사흘을 함께 걸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순례를 마치고 돌아갔던 12월 초, 눈 쌓인 료타이산을 넘어 88번 절로 향하던 험한 길도 그녀가 있어 발이 무겁지 않았다. 유난히도 싹싹하고 명랑하던 가요상도 기억난다. 왜 걷느냐고 물었을 때 “이런저런 일 때문에…”라며 말을 끊던 그녀. “몇 년 전에 아들이 죽었어요. 남편과도 결국 헤어졌죠.” 아이가 죽은 건 자기 탓이라고 울먹이는 그녀를 끌어안고 나도 울어버렸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그저 그 아이의 운명이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을 안다. 스무살 나이에 결혼한, 간호사였던 그녀. 늘 웃고 있는 고운 얼굴이었는데… 그날 오후, 가요상과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천문관에 갔다. 별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던 그 방에서 그녀도 나도 잠이 들고 말았다. 어쩌면 코를 골았을지도 모른다. 단잠을 자고 나오니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그 길에서 스물여덟의 그녀가 말했다. “모두들 말하지 못한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이 길을 걷고 있겠지요.” 찬바람 불어오는 겨울의 입구에서 사람들이 제각기 감추고 있을 비밀스런 이야기들을 떠올리니 왠지 마음이 훈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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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삼나무들의 기운이 성성한 고야산 대참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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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이웃 나라에 대해서는 새롭게 배운 것도 많아서 이 나라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게 됐다. 나라는 부자인데 국민은 가난하다는 일본. 그들은 가난한 게 아니라 검소할 뿐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일이 일상이고, 전기와 물을 아껴 쓰는 일은 몸에 익어 있었다. 화장실의 변기 꼭지는 대소가 구분되어 있고, 물을 채우며 손을 씻을 수 있는 구조가 대부분이었다. 도시와의 격차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 농촌의 고른 수준도 놀라웠다. 텃밭마다 귀퉁이에 정성껏 일구어 놓은 꽃밭이며, 마을마다 상징적인 동식물로 디자인한 맨홀 뚜껑이며, 동네의 하수로마다 떠 마시고 싶을 정도로 맑은 물이며-하수로에 살고 있는 민물게와 눈이 맞은 날, 얼마나 놀랐던지!-, 생활의 여유가 느껴지는 풍경이 가득했다. 아침저녁으로 집안의 불단에 모셔진 조상님께 인사를 하고, 신사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일상적으로 간구하고 감사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사람들에게 끌리는 만큼 풀리지 않는 의문도 깊어갔다. 한 국가의 정체성과 국민의 도덕성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는 걸까.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에 유례없이 지독한 식민지를 운영했을까. 나는 ‘좋은 식민지’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프란츠 파농이 지적했듯 식민지는 타자를 계통적으로 부정하는 광폭한 결의이기 때문이다. 731부대, 군 위안부, 한글 말살과 창씨개명, 그토록 철저한 타자의 부정이라니… 내 앞의 친절한 가네코(金子)씨와 ‘부도덕한 일본’ 사이의 간극이 너무 멀어 어지러울 정도였다. 때로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서 편견 없는 평가를 내리지 못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 답답하기도 했다. 애써서 평가절하하려는 마음도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시코쿠를 걷는 동안 이들의 장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값싸고 맛난 우동과 소박한 여관들 다시 찾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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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번 절 들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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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음식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낫토와는 끝까지 친해지지 못했지만, ‘하루의 화를 피하게 해준다’는 우메보시(매실절임)는 사랑스러웠다. 시코쿠에 오기 전에 나는 날것을 싫어했다. 여관의 저녁상에 절대로 빠지지 않는 주메뉴가 사시미. 처음엔 돈이 아까워 억지로 먹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그 탄력적인 촉감을 즐기고 있었다. 지척의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물고기들은 뱃속에서도 사흘은 파닥거릴 것만 같은 싱싱함이 살아 있었다. 이제 ‘회는 역시 간장에 찍어 먹어야 제맛이지’라며 젠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끝내 궁상을 면치 못한 가난한 여행자에게 최고의 음식을 꼽으라면 역시 가가와현의 우동이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사누키 우동. 소설가 하루키가 잡지사의 요청으로 우동 여행을 떠나 2박3일간 매끼 우동만 먹었다는 곳. 인구 1인당 우동집의 통계를 낸다면 일본에서 1위를 차지할 거라는 동네다. 정말이지 그곳의 우동은 어딜 가나 최고였다. 진한 국물맛과 쫄깃한 면발, 게다가 착하기 그지없는 가격-대짜를 시켜도 한 그릇에 300엔을 넘지 않는다-이라니. 우동이라는 음식에는 인간의 지적 욕망을 마모시키는 요소가 들어 있는 것 같다던 하루키의 과장스런 말을 나는 이해하게 됐다. 우동 때문에 길이 한없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품기도 했으니. 목욕 후의 녹차 한 잔을 빼놓을 수는 없다. 뜰 앞의 국화가 저물어가는 늦가을 저녁, 목욕을 마친 후 따뜻한 녹차를 마시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나른한 행복감에 젖어들곤 했다.
순례길의 또다른 주인공은 뭐니 뭐니 해도 ‘오카미상’(안주인)의 친절이 매력적인 ‘료칸’(여관)이었다. 매일 밤 찾아가던 여관의 다다미방과 저녁식사 시간은 순례의 꽃이었다. 87번 절 앞의 아즈마야 여관. 그곳 오카미상은 순례자들에게 받은 엽서, 이름표, 편지며 사진 따위를 몇 권의 앨범에 꼼꼼히 모아 놓았다. 100년 가까이 여관을 운영해온 집안의 여주인답게 센스도 뛰어났다. 숙소에 도착한 오후, 미리 온풍기를 틀어놓은 방에 들어서니 뜨거운 생강차부터 내주셨다. ‘외국인은 날계란을 안 먹더라’며 아침상에 달걀 프라이를 올려주기도 하셨다. 가가와현에선 우동을 먹어야 한다며 오세타이로 500엔을 쥐여주시던 분. 순례자를 위한 정성 어린 서비스를 제공하는 오카미상들이 가득한 시코쿠의 작은 여관들, 꼭 다시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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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든 가을 산사를 떠나는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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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절에 대해서라면 아직도 미스터리다. 무엇보다 도무지 스님들을 뵙기가 힘들어 절간의 풍경이 낯설었다. 목탁 소리도, 염불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절간이라니. 어귀에는 ‘일금 오만원 아무개’가 적힌 표석이 줄지어 서 있고, 늘 닫혀 있던 본당이 어쩌다 열린 곳은 물건 파는 좌판이 가득했다. 납경장에 도장을 받기 위해선 300엔씩 꼬박꼬박 바쳐야 했다. 숙박이 가능한 절들도 정해진 돈(1박 2식 6000엔 정도)을 받고 잠자리를 제공했다. 절은 아무나 와서 잠을 자는 곳은 아니지만 오가는 중생을 내쳐서도 안 되는 곳이 아닐까. 나는 문득 해마다 한 번씩 찾아갈 때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을 내주던 남도의 절간들이 그리워지곤 했다. 원하면 아무 때나 본당에 들어가 108배를 올릴 수 있었던 그 개방성도.
눈을 감지 않아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을 가로질러 새벽 등교를 하던 산골의 아이들. 추수 끝낸 농부의 여유로운 뒷모습도, 아침 햇살에 반짝이던 바다의 잔물결도, 자전거의 은륜을 굴리며 달려가는 시골 할머니들의 건강함도,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걷고 있던 내 몸에 가득한 생기도 생각난다. 혼자 걷는 일의 미덕에 대해서도 새삼스레 깨달았다. 걷는 일에만 집중하다 보면 행동도 생각도 단순해진다. 끊을 길 없던 욕망의 그물에서 벗어나 주어지는 작은 것들에 감사하는 법을 배운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자신을 긍정하는 힘에서 타인을 긍정하는 힘이 나오고, 결국 현재를 긍정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외로움에 대해서도 생각한 바가 많았다. ‘당신이 이국의 땅을 혼자 걸으며 쓸쓸해할 때 우리들은 직장에서, 가정에서 외로워하고 있었답니다.’ 어느 독자가 남긴 말이다. 결국 우리 모두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소통, 이해받고자 하는 갈망이 아닌가. 인간은 궁궐에서도 고독으로 죽어갈 수 있고, 가장 메마른 사막에서도 사랑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이기에. 나를 몰고 가는 힘이 외로움이라는 것도 인정하지만 그 길의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였다면 어땠을까. 외로움이 지나쳐 독이 되지 않았을까. 삶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임을 시코쿠는 다시 말해주었다.
홀로 부처와 대면하는 차분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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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일차 45번 절 이와야지부터 50일차 88번 마지막 절 오쿠보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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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에서 벗어나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려웠던지! 놀이와 일의 경계 사이에서 한참을 허우적거렸다. 한 시간에 몇 킬로를 가는지, 지금 만난 이 사람의 이름은 뭔지, 이 식당의 위치는 어디인지 따위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겨우 해방되었나 싶었더니 길의 끝이었다. 순수하게 놀이로서 여행을 즐기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아직은 답을 찾지 못했지만 그 답조차 길 위에서 찾게 될 것임을 안다.
순례는 그 마무리마저 지극히 불교적이었다. 미사에서 신부님이 호명을 하고, 모두들 눈물을 쏟아냈던 산티아고와는 달랐다. 그 어떤 대리인도, 예식도 없이 일대일로 부처와 대면할 뿐. 시작이 그랬듯 혼자서, 자기만의 힘으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반야심경을 외며 혼자 앉아 있던 마지막 밤. 그 담백한 마무리도 나쁘지 않았다.
글·사진 김남희 도보여행가 skywaywalker.com
김남희의 시코쿠 도보여행을 이번 회로 마칩니다.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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