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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싱글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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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도훈의 싱글 라이프
3월의 패션잡지는 부록이 끝내준다. 그래서 2월 중순이 되면 기자들 사이에서는 어떤 패션지가 어떤 부록을 끼워줄 거라는 소문이 돈다. 올해도 그랬다. 5천원짜리 모 패션지가 4만원짜리 정품 아이크림을 부록으로 준다는 소식이 일찍이 들려왔다. 교보문고로 달려갔다. 잡지 코너는 속절없이 잡지와 부록을 비교분석하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트에서 한정 할인 한라봉 세트를 차지하려는 십년차 주부의 심정으로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잡지는 없었다. 어디선가 내 이름 석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씨네21> 김용언 기자다. “벌써 매진이에요.” 남친을 대동하고 아이크림을 건지러 온 그녀는 “이젠 반디앤루니스로!”라는 결언을 남기며 연기처럼 사라졌다.
힘이 나질 않았다. 교보에 없다면 반디앤루니스에도 없을 것이다. 영풍에도 없을 게 틀림없다. 머리에 선명한 이미지가 하나 떠올랐다. 책이 풀리는 순간 광화문과 종로의 오피스 레이디들이 점심을 포기하고 쓰나미처럼 서점으로 밀려들어 잡지와 아이크림을 쓸어 가는 무시무시한 아노미적 이미지. 나는 그 순간 몸을 흠칫 떨며 남성 패션잡지를 하나 집어 들었다. 3월에는 남성잡지도 부록이 꽤 괜찮은 편이다. 여성지들처럼 고결한 뷰티용품을 순결한 가격에 끼워주진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해를 위한 남성 스타일링 북이 부록이다. 트렌드에 상관없는 베이식한 스타일링에 대한 성실한 조언이 필요하다면 3월 남성지들의 부록은 꽤 쓸만하다.
그런데 카페에 앉아서 부록을 읽다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따라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정직하고 쓸만한 충고마저도 깐깐한 조언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요즘 남자 신발의 유행품목은 태슬 로퍼와 데크 슈즈란다. 데크 슈즈는 알겠는데 태슬 로퍼가 대체 뭔지 몰라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애들이 입는 체크 셔츠와 어른이 입는 체크 셔츠는 다르단다. 나에게는 여섯 장의 체크 셔츠가 있는데 그중 뭐가 애들의 체크 셔츠고 뭐가 어른의 체크 셔츤지 도무지 모르겠다. 악. 가슴에 주머니가 있는 셔츠는 거들떠도 보지 말라고? 나는 심지어 양 가슴에 주머니가 있는 셔츠도 두 장이나 있는데 말이다.
셔츠 안에 티셔츠를 입으면 안 된다는 조언에 이르러서야 나는 패션의 법칙을 일일이 따르는 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얼마 전 구입한 화이트셔츠 안에 굳이 크루넥 티셔츠를 입은 건 디자이너 드리스 판 노턴의 사진 때문이었다. 이 위대한 디자이너는 셔츠 안에 같은 색의 러닝톱을 입고 있었다. 아주 멋졌다. 물론 완벽한 복식의 법칙을 따르면 완벽한 신사가 될 건 틀림없다. 하지만 완벽한 신사는 좀 지루하다. 게다가 여자들은 완벽한 복식의 신사 따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패션지 여자 에디터도 말했더랬다. “저보다 옷 잘 입는 남자랑 연애할 마음은 없어요. 옷 입는 방법 충고하는 남자는 더더욱.” 이거야말로 패션지 복식의 충고를 숙지하겠노라 결심한 결혼 적령기의 남자들이 들어야 할 유일한 충고렷다.
김도훈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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