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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2.25 21:16 수정 : 2009.03.01 18:02

안녕 시칠리아, 안녕 나의 대부.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매거진 esc]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내 핏줄에 요리하는 유전자를 새겨준 주세페와
잊지 못할 섬마을 사람들

이 연재의 첫 번째 글은 2007년 가을에 실렸다. 나는 대략 이렇게 썼던 것 같다. “지중해의 태양은 자글자글 끓었다. 나는 동양에서 시칠리아로 건너온 원숭이 대접을 받으며 주방에 던져졌다. 찜통 같은 주방에서 보조 요리사의 하루가 시작됐다. 나는 너무 삶은 국수 가락처럼 퍼져버렸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직관과 선입견은 모두 허상이었다. 나는 펄펄 끓는 9개의 파스타 솥에서 정확한 시간에 파스타를 꺼내 요리사님들에게 바쳐야 하는 노예였다.”

“요리사는 어머니처럼 먹이는 사람이라네”

그랬다. 북부의 요리학교를 마치고 시칠리아행 기차에 올랐을 때, 나는 적당히 낭만적인 요리사 생활을 즐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 앞의 운명은 얼치기 요리사의 꿈을 산산조각냈다. 수습 요리사에게 꿈이란 없으며, 오직 존재하는 것은 쫓겨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생존 본능이었다. 왜 이탈리아의 국수는 설삶아 알 덴테(al dente)가 되어야 하는지, 소시지는 어떻게 만드는지, 이탈리아의 돼지는 어떻게 도륙을 내어 살코기를 얻고 기름을 받는지 등은 책에 쓰여 있는 것과 달랐다. 새우 가시에 손톱 밑을 찔리지 않고 껍질을 잘 벗기는 법은 무엇이며, 왜 리코타 치즈의 물기를 제거하지 않고 만두를 만들면 안 되는지도 책에는 없었다. 그뿐이랴. 왜 낮에는 이탈리아의 명물 장작 화덕에 구운 멋진 피자를 먹을 수 없는지, 저녁 6시까지 전통 피체리아에선 피자는커녕 물 한 잔 얻어 마실 수 없는지까지 나는 모든 걸 길에서 배웠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내가 북부 요리학교 근처의 기차역에서 받아든 기차표에 자그마치 ‘1750’㎞라고 쓰여 있던 숫자의 비현실감. 나의 기차여행은 450㎞ 길이의 경부선을 넘지 않았다. 어쨌든 24시간에 가까운 기차여행은 꽤 낭만적이었다. 비록 침 자국이 선명했지만 베개를 나눠주는 차장도 있었다. 그 베개를 베고 이탈리아 반도의 북에서 남으로 달렸다. 그리고 기차를 하나씩 나눠 배에 싣고 메시나 해협을 건넜으며, 그 기차를 다시 조립할 동안 거대한 철부선의 옥탑에서 카푸치노를 한 잔 마시며 멀리 희붐하게 보이는 시칠리아 섬, 그 미지의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돌과 바람으로 이루어진 황량한 길을 시칠리아 시골 열차로 갈아타고 기진맥진 섬 어느 작은 시골 간이역에 닿았을 때 웬 잘생긴 이탈리아 남자가 나를 맞았던 순간을 말이다. 그는 입성도 좋아 내가 일할 식당의 사장처럼 보였다. 알고 보니 셰프 오너, 즉 식당의 사장이자 주방장인 인물 주세페 바로네였다. 주세페라는 이름보다 ‘시뇨르 바로네’라는 전통적인 호칭을 좋아했던 그는 나의 새 아버지였다.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이탈리아어도 서툴고, 요리는 더더욱 엉터리인 한 동양인의 아버지 노릇을 충실하게 했다. 따귀를 후려칠 만큼 내가 큰 실수를 해도 그는 감싸주었으며, 이탈리아, 아니 시칠리아의 사람들을 구경시켜 주었다.(물론 내가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상황이었겠지만 말이다.)

주세페 바로네. 그는 나의 정신적 대부, 갓 파더(God Father), 파드레 그란데(Padre Grande)였다. 그가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에트나 화산섬에 올라 망태기로 버섯을 따는 노인네들의 주름을 볼 수 있었으며, 구릿빛 팔뚝의 억센 참치잡이 어부들이 득실거리는 전통 어시장을 토착민처럼 드나들 수 있었을까. 그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토끼고기에 초콜릿 소스가 어울리는지 알았으며, 최고의 스파게티는 좋은 밀가루 1㎏에 최고의 달걀 1개를 넣는다는 걸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내게 유전자처럼 심어준 건 요리하는 영혼이었다. 그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는 너의 재료로, 가장 전통적인 조리법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먹는 요리를 만들라’는 요리의 삼박자를 깨우쳐주었다. 모양이나 장식으로 멋을 내는 줄만 알았던 이탈리아 요리의 진정한 승리는 이 삼박자에 있었다는 걸 그는 알려주었다. 그는 좋은 재료를 구하려 하지 않고, 그저 전화통을 붙들고 배달받는 <미슐랭 가이드> 스타 요리사를 경멸했으며, 멀리서 수입한 재료를 자랑하는 요리사에게 호통을 쳤다. 공장화·기계화되는 재료의 역사를 슬퍼했으며, 돼지나 닭이 항생제와 호르몬의 늪에서 신음하는 걸 참지 못했다. 항상 지역 어린이들이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하는지 가르치고 연구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그건 영양학자나 교육자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요리사는 아이들의 어머니처럼 먹이는 사람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그가 이젠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슬로푸드의 핵심 조직원이며, 테라 마드레(Terra Madre, 어머니의 땅이란 뜻으로 건강한 땅에서 건강한 정신으로 기른 음식물을 먹어야 지구인이 살 수 있다는 요리·식품 운동)의 골수 운동원이다.

그의 아내 마리아 바로네는 나의 어머니였다. 어수룩한 동양 사내가 가혹한 시칠리아의 주방에서 견뎌낼 수 있는지 늘 세심하게 살펴보았고, 내 눈에서 서울에 두고 온 딸에 대한 그리움을 읽을 줄 아는 천생 엄마였다. 그녀는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한데, 종교적 신심은 별로 없으면서도 ‘여자들’이 신비한 동양 종교에 빠져 있는 걸 못마땅해하는 눈길을 무시하고 씩씩하게 모임을 꾸려나가는 멋진 불자였다.

이들의 두 딸 카를라와 프란체스카도 기억난다. 작년에 오랜만에 들렀다 훌쩍 커버린 모습에 매우 놀랐다. 카를라는 우리 나이로 중 2, 프란체스카는 초등 5학년이지만 당시는 둘 다 젖먹이였다. 특히 프란체스카는 나의 이탤리언 제스처 선생이기도 했다. 그녀는 말을 전혀 못하는 젖먹이였는데, 희한하게도 열 가지 가까운 제스처로 자기 의사표현을 했다. 어깨를 으쓱하거나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 뭔가를 애원하고, 한 손끝을 모아 하늘을 향해 찌르며 뭔가 불만을 표시하거나 집게손가락을 볼에 갖다 대며 음식이 맛있다고 표현하는 것들까지 진정 그녀의 제스처는 정확했고, 나는 그걸 따라하면서 ‘말보다 동작이 먼저 시작되는’ 이탈리아인의 정서를 배웠다. 언젠가 나는 이 제스처를 모두 파헤쳐(?)볼 생각이다.

주방 식구들도 생각난다. 늘 대마초를 빨고 다녀 주세페의 지청구를 들었지만, 요리 솜씨 하나는 끝내줬던 뻬뻬. 군대 가기 싫어 병원에서 환자식 짬밥을 만들며 ‘방위병’으로 군필을 한 뻬뻬. 17살 어린 나이에 뭍의 대도시에서 열린 요리대회에서 1등을 한 뒤 자신이 실린 신문기사를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품에 안고 다니며 자랑을 했지만 대도시 최고급 레스토랑과 인연을 맺지 못했던 뻬뻬.(엄밀히 따지면 그는 고향을 떠날 수 없는 마마보이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독립하여 ‘포모도로’라는 식당을 인근 시골에 차렸지만 불경기 대폭탄을 맞고 고전중인 뻬뻬. 불과 60만원의 월급을 받아 몽땅 평소 입고 싶었던 가죽 재킷과 바지를 사는 데 투자했던 한심한 뻬뻬.(칼날이 닳아서 젓가락이 되어도 새것을 사는 법이 없는 그가 냉큼 사들인 그 가죽옷이야말로 이탈리아가 왜 패션왕국인가 보여준다.)

늘 허덕허덕 출퇴근하는 내게 에스프레소 한 잔을 공짜로 주던 카페 아저씨. 그는 나 말고도 동네 사람들에게는 늘 외상을 해주었는데, 두툼한 외상 장부 대신 기억력이 형편없이 나쁜 머리에 외상값을 입력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외상값을 받으면 횡재한 것 같다나 어쨌다나?

내가 아는 이탈리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피체리아 ‘라 콘테아’의 피차이올로 아저씨도 생각난다. 그는 단 3초면 피자 반죽 하나를 온전히 둥글게 빚어냈다. 그가 반죽을 한 손으로 집어들고 공중에 띄워둔 채로 번개같이 양손바닥을 움직여 반죽을 완성하는 걸 보면 신기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이탈리아 최고의 피자를 만들던 피차이올로 아저씨

이름을 일일이 밝힐 수 없는 수많은 동네 사람들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식당의 부엌에 첫출근했을 때, 수없이 많은 이들이 밥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니라 나를 구경하러 왔다는 사실조차 나는 뒤늦게 알았다. 나는 시칠리아 시골의 원숭이였으니까. 내가 말하는 것, 내가 입는 옷, 내가 먹는 것이 그들은 모두 신기한 볼거리였다. 인구 3만의 시골 읍에 나타난 한국 사내가 얼마나 신기했을까. 한국인이라곤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헤딩 한 방으로 ‘아주리군단’을 박살낸 북한 축구팀의 영웅 박두익밖에 몰랐던 그들에게 말이다.

박찬일 요리사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사랑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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