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3.11 20:07
수정 : 2009.03.1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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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면 다른 도시에 도착하리라는 설레임, 야간열차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불면을 안겨주는 공간이다.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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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독서광 노동효의 썸플레이스
<책상은 책상이다>와 자그레브에서 만난 국제 부랑자, 막스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를 처음 읽은 것은 열여섯의 어느 날이었다. 책 속에는 정말 이상한 사내들로 가득했다.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확인한답시고 길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 사내, 일상이 지겨워 사물의 이름을 바꿔 부르다가 아무하고도 대화를 할 수 없게 된 아저씨, 세상을 등지고 수십년 발명에 전념해서 완성한 발명품이 이미 발명된 텔레비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발명가, 요도크 아저씨 이야기만 되풀이하다가 모든 단어를 ‘요도크’로 바꿔 부르게 된 할아버지. 정말 읽다 보면 내 정신까지 이상해지는 책이었다. 아마도 작가가 말하는 ‘소외’와 ‘소통 부재’ 문제를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도 어른이 되고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유럽 여행 중 만난 막스는 마치 <책상은 책상이다>에서 현실 세계로 툭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내가 아는 어떤 남자는 열차 시간표를 하나도 빠짐없이 외우고 있었다. 세상에서 그를 즐겁게 하는 유일한 것이 바로 열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온종일 역에서 살다시피 하며 열차들이 도착하고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헝가리를 출발해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도착한 것은 해가 다 저물 무렵이었다. 야간열차를 기다려 스플리트로 갈 참이었다. 역 광장에 퍼질러 앉아 담배를 물었을 때 금발의 사내가 다가왔다. “나도 하나 줄래?” 그에게 한 개비를 건네주었다. “이건 헝가리제잖아. 난 독일산만 피우는데, 독일산은 없어?” “응.” “그럼 나 한 푼만 줄래?”
마치 알고 지내던 사이인 양 능청스런 요청에 나는 어느새 지갑을 열고 있었다. “에이, 이건 달러잖아, 도로 가져가. 마르크는 없어?” 국적을 가려 돈을 거절하는 이상한 거지였다. 막스는 이제 크로아티아가 지겨워졌고 기차표만 있으면 독일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계속 마르크가 필요하다고 중얼댔다. 환전을 하면 되지, 왜 꼭 마르크가 필요한 걸까?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각 나라에서 오는 열차 시간을 다 외우는 그는 사라졌다가 나타날 때마다 한 아름의 잡지를 가지고 왔다. 대체 뭘 하던 작자였을까? 막스는 잡지 속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이 어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지 죄다 기억하고 있었다. 이 그림은 뉴욕의 구겐하임에 있어. 이 그림은 런던의 테이트에 있고, 이 그림은 파리 루브르에 있지. 그러다 그가 물었다. “몇 시야?” “7시.” “아이쿠! 커피 타임이네, 커피 마시고 다시 올게.” 열차 안에 숨어 들어가 잠을 잔다는 노숙자가 커피 타임을 챙기다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친구였다.
막스와 헤어져 야간열차에 올라탔다. 침대칸 2층, 덜커덩덜커덩, 불면의 산악지대를 지나던 나는 막스가 페터 빅셀의 소설에 등장하던 ‘열차 시간표와 그 도시의 계단 숫자를 모두 외운 뒤 전세계 모든 도시의 계단 숫자를 알기 위해 기차를 타고 떠났던 사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그는 세계의 모든 그림들이 어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지 알고 싶어졌던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노동효 여행작가·<길위의 칸타빌레> 저자
newcross@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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