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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18 16:35 수정 : 2009.03.18 16:46

나지언 자유기고가

[매거진 esc] 나지언의 싱글라이프





추리소설이나 탐정물을 읽을 때마다 나를 괴롭히는 장면은, 누군가가 죽은 후 그의 집을 제멋대로 수색하는 것이다. 죽은 자에겐 자신의 집을 뒤지지 말라고 거부할 권한 따윈 없다는 듯이. 그리고 사람들은 말한다. “집 안에 개봉하지도 않은 화장품이 잔뜩 쌓여 있는 걸 보니,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혹은 “그가 8년 전에 쓴 일기를 보니 ‘죽고 싶다’고 쓰여 있군요. 아무래도 이 죽음은 예고된 것 같습니다.” 그중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죽은 이의 애인에게 유품으로 챙기고 싶은 걸 가져가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사하고 싶은 애인에게 집을 뒤지라고 하다니! 죽은 애인 집을 뒤지는 걸로 시작하는, 이와이 순지의 끔찍한 영화 <러브레터>에는 순애보라도 있지. 애인에게 보여줘선 안 될 것들이 집 안 곳곳에 있단 말이다.

혼자 사는 노처녀의 삶에서 자주 거론되는 죽음은, 유명한 영화 캐릭터(브리짓 존스)가 말했던 것처럼 ‘죽은 지 며칠 지나서야 고양이 밥으로 발견돼 있다’는 클리셰다. 최근 며칠 핸드폰이 고장 나서 아무와도 통화하지 않았고, 핸드폰 고치랴 새벽까지 일하랴, 직장 동료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싱글의 가장 큰 문제점인 청승이 시작됐다. ‘내가 죽으면 과연 누가 나의 장례식에 와서 울어 줄까?’라는, 어렸을 때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상상을 해 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약 나의 집을 수색한다면? 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한 번도 입진 못했지만 커다란 리본이 기괴하게 달린 원피스형 스웨터는 어떡하지? 마치 곧 결혼할 사람처럼 미친 듯이 수집한 온갖 그릇들은? 귀찮아서 버리지 않은 옛날 남자친구로부터 받은 편지와 멍청한 고민만 써놓은 일기들은? 누군가에게 선물하려다가 때를 놓쳐 아직 못 준 아기 옷은? 컴퓨터 안에는 차마 눈 뜨고 못 봐줄 습작 원고와 무슨 이유 때문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서른이 넘은 여자가 듣는다고 하기엔 꽤나 민망한 유승준 노래 ‘침 흘리는 여자’도 있다!

그러니까 나의 부고 기사는 이렇게 전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자매이자 동료이자 딸인 나지언씨는 생전에 얼굴보다 커다란 리본이 달린 옷을 좋아했으며, 아이 옷과 그릇들을 꾸준히 마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결혼에 대한 로망과 집착이 있었으나 결코 실현하지 못했으며, 남는 시간을 결국 부족한 재능을 허비하는 것으로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안타까운 죽음은 ….” 그리고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내 집에서 찾아낸, 가장 뚱뚱했고 못생겼던 때의 내 사진을 싣겠지. 누군가가 나의 삶을 이해 주리라는 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기대다.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 내 집을 절대 수색하지 말라는 유언장을 지금 당장 쓰든지, 집 안에 있는 어리석은 물건들을 빨리 내다버리든지.

나지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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