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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18 19:19 수정 : 2009.03.18 19:19

프라하는 중세의 박물관으로 불릴 정도로 옛 모습이 잘 보존됐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피했기 때문이다.

[매거진 esc] 노중훈의 여행지 소문과 진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명제만이 변함없는 사실이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어떤 방식, 또는 어떤 형태든 변하기 마련이다. 물론 변화가 곧 발전을 뜻하지는 않는다. 시곗바늘을 뒤로 돌려 퇴행하는 도시들도 있고, 어항 속 물처럼 시간이 고여 있는 도시들도 있다.

체코 프라하는 영화의 도시다. 그런데 세계 최고의 영화제가 열리는 프랑스의 칸, 영원한 판타지 공장인 미국의 할리우드, ‘볼리우드’라 불리며 세계 최대의 영화 생산지로 자부하는 인도의 뭄바이와는 그 의미가 좀 다르다. 자국 영화 생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다른 나라의 유수한 영화들에 시공간적 배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색창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프라하 특유의 아우라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프라하의 봄>, <미션 임파서블>, <이중간첩>, <본 아이덴티티>, <007 카지노 로열> 등 그동안 프라하를 거쳐 간 영화들은 무수히 많다. 해마다 십수 편의 외국 영화들이 줄을 지어 찾아온다. 몇 가지 설명이 따라붙는데, 역시 도시 전체가 ‘중세의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옛모습을 제대로 보존하고 있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다. 인접 국가인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95퍼센트 이상이 파괴된 데 비해 프라하는 참혹한 전란 속에서도 온전하게 제 모습을 지켜냈다. 무엇보다 체코인의 실리적인 기질에 힘입은 바 크다. 1939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히틀러의 프라하 공습 위협에 힘 한번 못 쓰고 독일에 점령됐다. 그러나 독일군이 무혈 입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프라하는 생채기 하나 입지 않고 유서 깊은 문화유산을 간직할 수 있었다.

프라하가 ‘물려받은’ 도시라면 노르웨이의 올레순(Alesund)은 ‘고쳐 지은’ 도시다. 노르웨이를 찾는 목적의 5할을 차지하는 피오르(피오르드)를 가까이에서 보여주는 대형 크루즈가 스치듯 잠시 들르는 올레순은 아르누보 양식의 석조건물이 많기로 유명하다. 겉모양은 동화 속 마을처럼 알로록달로록하지만 그 이면에 애처로운 사연이 흐른다. 1904년 1월 23일, 모든 사람이 잠든 새벽 2시15분. 취객의 부주의로 마을 서쪽의 마가린 공장에서 큰불이 일어나 도시 전체를 집어삼켰다. 16시간이나 지속된 불길로 1000여 주택 중 850채가 전소됐고, 1만2000여 인구 중 1만여 명이 거리에 나앉게 됐다. 희생자가 단 한 명뿐이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모두들 그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올레순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독일을 위시한 유럽 각국의 원조를 발판으로 곧장 재건에 나섰고, 오래지 않아 일관된 콘셉트를 지닌 새로운 도시가 탄생했다. 우선 세계 각지에서 공부하던 노르웨이 건축가 50명에게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하나같이 아르누보 양식에 영향을 받은 이들을 주축으로 1907년까지 350채에 이르는 아르누보 건물이 도심 곳곳에 세워졌다. 건물마다 둥근 뾰족탑, 꽃, 나무줄기, 동물 등에서 모티프를 얻은 아르누보 특유의 장식미가 심어졌다. 올레순과 피오르는 어딘가 닮아 보인다. 상처는 아물고 결국 새살이 돋아난다는 전화위복의 섭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빙하가 무자비하게 후벼 놓은 자리에 바닷물이 흘러들어 탄생한 걸작이 바로 피오르다. 외부의 충격으로 생긴 생채기는 새로운 풍경의 밑거름이 되어 주는 법이다.

노중훈 여행칼럼니스트 superwin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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