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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19 19:59 수정 : 2009.03.20 13:38

루이14세도 애용한 스위스 은행의 굴욕

[뉴스 쏙] 비밀계좌의 300년 역사

1934년 은행 비밀주의 법제화
검은돈 관리·조세피난처 노릇 비난
은행법 완화 예고…대량인출 고심

스위스 은행가에서 ‘침묵’은 오랜 생존비법이다. 1943년 스위스의 한 은행원은 74개 비밀계좌의 고객 정보를 나치에 빼돌리다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지금도 스위스에선 고객 정보를 누설하면 6개월 징역 혹은 5만스위스프랑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정보 누설을 막으려고 직원을 최소화해 직원 수가 100여명에 불과한 은행들도 여럿이다.

철저한 비밀 보장으로 전세계 검은돈을 끌어모아온 스위스 은행들이 기로에 섰다. 미국 등이 스위스를 ‘조세 피난처’라고 비난하며 국제적 제재를 추진하자 지난 13일 스위스 정부는 은행법을 완화하겠다고 밝혔다. ‘비밀주의’로 유럽 최대 은행에 올라선 유비에스(UBS) 출신인 한스루돌프 메르츠 스위스 대통령은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가 더는 ‘양도 불가’ 대상이 아님을 시사했다. 유비에스는 앞서 미국 연방 검찰이 탈세 수사를 본격화하자 고객 250명의 계좌 정보를 넘겨주는 수모를 겪었다. 스위스 비밀은행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300년 넘게 성황을 누려온 이들의 운명에 세계의 눈길이 모이고 있다.

■ 원수에게 돈 빌린 사실 감춰주며 시작된 비밀주의 스위스 비밀은행의 태동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85년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신교도들의 종교 자유를 보장하던 ‘낭트 칙령’을 폐지하자 프랑스의 위그노 신교도들 상당수가 스위스로 옮겨가 은행업을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주요 고객은 국경 확장을 위해 큰돈이 필요했던 루이 14세였다. 자신이 추방한 신교도들에게 돈을 빌린다는 사실이 머쓱했던 국왕은 이런 사실을 감추려 했고, 이때부터 고객에 대한 ‘비밀주의’가 싹텄다. 100년 뒤 프랑스 혁명 때 스위스 비밀금고는 안전한 피난처로 각광받는다. 혁명의 혼란을 피하려는 프랑스 귀족과 부자들이 스위스 은행의 단골손님으로 몰려왔다.

비밀주의가 아예 스위스 정부의 정책으로 채택된 것은 1차 세계대전 무렵이다. 유럽 통화들이 휘청댄 반면 정치적 중립을 지켜온 스위스프랑은 매력적인 통화로 떠올랐다. 스위스 의회는 1934년 비밀주의를 법제화했다. 세수 손실에 분개한 프랑스 정부가 스위스 은행들의 파리 지점을 급습했고, 독일의 나치정권도 유대인 계좌 색출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스위스 은행은 나치를 피해 온 유대인과 유대인으로부터 재산을 약탈한 나치를 모두 고객으로 뒀다. 이후 스위스 은행들은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들의 예금을 집어삼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1998년에는 결국 스위스 은행에 돈을 맡겼다가 돌려받지 못한 유대인 유가족들에게 12억5천만달러를 보상하기로 합의했다.

■ 과연 몰락의 전주곡일까? 스위스는 독특하게 ‘조세 기피’와 ‘조세 사기’를 구분한다. 후자만 처벌 대상이며, 공문서를 위조했을 때만 적용된다. 물론 대다수 나라들에선 둘 다 ‘범죄’에 속한다. 이 구분법의 신세를 톡톡히 진 이들이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 나이지리아의 사니 아바차 같은 독재자들이다. 아바차가 자국에서 스위스 은행에 빼돌린 돈은 무려 43억달러(우리 돈 6조원가량)다. 스위스는 두 나라에 수억달러를 돌려줘야 했다.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비밀계좌설도 꾸준히 나돌았다. 독재자들의 검은돈 논란은 스위스의 비밀주의에 대한 비판을 불렀고, 90년대 스위스는 압력에 밀려 ‘돈세탁’ 방지에 나섰다.

2001년 9·11 테러는 스위스 은행을 옥죄는 또다른 계기가 됐다. 테러단체의 돈줄을 추적하는 미국과 마찰을 빚게 된 것이다. 지난해 금융위기가 터진 뒤 미국은 스위스를 더 마뜩잖게 바라보고 있다. 미국인들이 해외로 자산을 은닉하는 바람에 미국 정부가 입는 세수 손실은 연간 1천억달러(우리 돈 139조원가량)다. 미국 법무부는 최근 유비에스 은행을 상대로 탈세 혐의 미국인 5만2천명의 계좌 내역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며 스위스를 압박중이다. 유럽 나라들도 스위스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블랙리스트’에 올리겠다며 으르렁거린다.

■ 스위스, 비밀금고 사수에 총력 스위스 국민들에게 은행은 ‘초콜릿’만큼이나 각별하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선 스위스 국민의 81%가 은행 고객에 대한 ‘비밀주의’를 지지했다. 스위스 경제의 주춧돌인 은행의 붕괴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인구가 750만명에 불과하지만 은행이 300개가 넘는다. 은행업은 스위스 국내총생산(GDP)의 12%를 차지하며, 세금을 피해 스위스를 찾은 해외 예금만 2조달러(2790조원가량)에 이른다.

최근 스위스 은행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이 다시 들끓으면서 스위스 은행들은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를 걱정하고 있다. 스위스 정부는 “은행법을 완화하는 데 최소 몇 년이 걸릴 것”이라며 이런 우려에 대한 불끄기에 나섰다. 일부 정당은 스위스 헌법에서 은행 비밀주의를 고이 간직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벌이자며, 10만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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