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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25 19:30 수정 : 2009.03.25 19:30

김도훈의 싱글 라이프

[매거진 esc] 김도훈의 싱글 라이프

갑자기 날씨가 18도까지 치솟았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커졌다. 때가 왔다. 겨울옷을 모조리 빨고 드라이클리닝을 한 뒤 벽장 속에 처넣을 시즌이 왔다. 옷장을 열었다. 모직으로 만들어진 시커멓고 칙칙한 코트와 스웨터들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옷장이 토해낸 옷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던 중 끔찍한 사실을 발견했다. 3분의 1에 가까운 옷들은 난생처음 보는 듯 낯설었다. 나머지 3분의 1은 한두 번 입고 사이즈가 영 마음에 안 들어 처박아둔 것들이었다. 기부라도 해야 할까. 그럴 순 없다. 제 자식을 기부하는 모진 부모는 세상에 없다. 나에게 이 엄청난 옷 덩어리들은 자식이나 마찬가지다.

수선을 맡기기로 했다. 우습게도 나는 단 한 번도 수선집에 가본 적이 없다. 남의 손에 내 자식들을 맡기는 게 너무나도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맞지 않는 옷을 샀을 때의 대처법은 딱 두 가지였다. 1. 그냥 맞는 거라 생각하고 입고 다니기(소매 걷기는 기본. 어깨가 헐렁하게 내려오면 ‘나는 지금 오버사이즈룩을 연출중’이라고 자기최면을 건다). 2. 옷장 속에 처박아놓고 새로운 시즌이 올 때마다 꺼내서 5분간 감상한 뒤 다시 처박아놓기. 이런 건 절대 올바른 대처법이 아니다. 아니, 대처법이라고 할 수도 없다. 게다가 수선이라는 무시무시한 행위에 직면할 필요가 충분할 만큼 옷도 많아졌다.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친절하고 꼼꼼하게 잘 수선해 준다고 소문이 난 수선집이 있었다. “젊음과 패션의 거리 이대 앞에서 십수년간 개성과 유행에 맞춰 정성껏 수선 및 맞춤을 해온 집”이란다. 팔이 너무 길거나 어깨가 커서 도무지 입을 수 없는 ‘새 옷’들을 짊어지고 수선집으로 향했다. 수선집 주인이 가져간 옷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딱 보니까 몸에 완전히 피트되는 건 싫어하면서도 적당하게 슬림한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시네요.” 빙고. 장인의 눈은 역시 다르다. 네 벌에 9만원은 가슴 아프지만 관상용으로 모셔뒀던 톰 브라운의 옥스퍼드 셔츠를 실생활에서 입고 다닐 수 있다는 건 충분히 감격적이다.

문제는 수선한 네 벌이 테스트용으로 가져갔던 샘플일 따름이라는 거다. 엄청난 수의 셔츠와 재킷들이 ‘햇볕 좀 보자’며 아우성을 치고 있다. 계산해 보니 수선비만으로도 수트 한 벌은 나오게 생겼다. 이내 공상에 빠져들었다. “올해는 의상학원 주말반이라도 끊어 볼까? 최소한 패턴 만드는 것과 재봉질의 기초만 수강해도 좋을 거야. 마음에 쏙 드는 옷을 찾을 수 없을 땐 동대문에서 천 사다가 내 취향대로 만들어 입는 거지.” 독일 디자이너 헬무트 랑이 금융회사를 때려치우고 디자이너가 된 계기도 자신에게 맞는 옷이 없었기 때문이다. 헛된 공상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너덜너덜한 재킷의 주머니를 기워 보겠다고 바늘을 들고 설친 어느 날, 나는 때늦은 디자이너와 직업 변경의 꿈을 완전히 떨쳐버렸다. 재킷의 주머니는 이내 벨기에 해체주의 디자이너의 돌 지난 손녀가 기운 것처럼 아방가르드하게 추해졌다. (흰 실이 없어서 대용했던) 분홍 실을 뜯어내던 나는 마침내 진정한 결론에 다다랐다. 바느질에 재능도 없고 네 벌에 9만원이 아깝다면 결론은 단 한 가지뿐이었던 것이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은 사지 말지어다!

김도훈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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