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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싱글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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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도훈의 싱글 라이프
정전이 됐다. 밤 10시. 모든 가전제품과 조명이 홀연히 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몇 달 전에 사둔 향초를 찾아서 켜느라 호들갑을 떤 뒤 관리실에 전화를 했다. 통화중이다. 창밖을 내려다봤다. 오피스텔 주민들이 잔뜩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잠시 후 한국전력에서 나온 거대한 차 석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왔다. 이거 큰일이다. 갑자기 한전 차량이 왔으니 이건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전이란 소리다. 다음날 마감해야 할 기삿거리를 잔뜩 들고 귀가한 처지다. 조처를 해야 했다. 아니, 이유라도 알아야 했다. 전전긍긍하며 불이 켜지길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옷을 챙겨입고 복도로 나왔다. 비상등 몇 개만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반응이 없다. 인기척도 없는 어두운 오피스텔 복도가 슬래셔 호러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13일의 금요일>이나 <스크림> 같은 슬래셔 영화를 볼 때마다 이렇게 부르짖지 않았던가. “저런 쓸개 빠진 머저리들. 나라면 절대 밖으로 안 나가고 문을 걸어 잠근 방에서 누가 올 때까지 조용히 처박혀 있을 거야!” 갑자기 오싹해졌다. 복도를 돌아서면 하키 마스크를 쓴 살인마가 도끼를 들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영화기자들의 직업병이다) 얼른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정전 때문에 전자열쇠가 작동하지 않을까봐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히 전자열쇠는 작동한다. 어둠 속에서 30여분을 앉아 있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향초를 대여섯개 모아놓고 독서를 하기로 결심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들? 정전의 밤에 하루키가 웬일이람. 나에게 하루키는 햇살 내리쬐는 휴가지에 가장 어울리는 글쟁이다. 에스에프(SF) 걸작선에 실린 래리 니븐의 <변하는 달>을 펼쳤다. 정전의 밤에 가장 어울리는 책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남녀는 어느 날 갑자기 지구가 멸망할 거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뭘 하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둘은 최후의 데이트를 즐긴 뒤 소박한 정찬을 사서 높은 빌딩으로 향한다. 그리고 종말의 해일이 다가오는 순간 서로의 체온을 껴안는다. 정전의 밤에 종말의 밤에 대한 글을 읽으니 마음이 촉촉해졌다. 오늘이 종말의 밤이라면 나처럼 홀로 오피스텔에 구겨져 있는 독신남녀들은 뭘 할까. 먼저 부모와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야겠지. 그러고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을 끓여서 찬찬히 음미하는 거야. 독한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후 지난번 세일 때 사서 한 번도 못 입어 본 옷을 꺼내 입어야지. 촉촉해진 마음이 축축해지는 순간 형광등과 티브이가 켜졌다. 스피커가 소리를 질렀다. “관리실에서 알려드립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전에 사과드립니다.” 나는 형광등과 티브이를 다시 꺼버리고 누웠다. 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그래, 세일 때 사서 한 번도 못 입어 본 옷. 그걸 입고 말이지 …. 김도훈 <씨네21> 기자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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