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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4.08 20:59 수정 : 2009.04.11 11:58

왼쪽부터 천화원 삼선짬뽕은 담백했다. 천화원 삼선자장.

[매거진 esc] 60년 전통 자랑하는 거제도와 제주도 중국집 명가를 찾아서

밸런타인데이는 과자업체의 광고 전략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공정무역 초콜릿을 주고받자는 움직임이 대안으로 논의된다. 그럼 ‘정치적으로 올바른’ 블랙데이(4월14일)는 공정무역 밀가루와 해산물로 만든 자장면을 먹자는 게 될까? 불행히 이는 아직 불가능하다. ‘만든 사람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 먹자’는 정도면 어떨까. 이미 맛집이 많이 알려진 서울을 떠나, 지역에서 수준 높은 음식을 만드는 두 세대 이상 된 오래된 중국집을 찾아 헤맸다. 음식 칼럼니스트 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가 경남 거제의 ‘천화원’(天和園)과 제주도의 ‘원덕성원’(原德盛園)을 추천했다.

담백함의 비법은 깨끗한 주방? 거제도 천화원

유산슬은 한자로 溜三絲(류삼사)라고 쓴다. 산슬(三絲)은 ‘3종류의 채를 썬 재료’를 뜻한다. 해삼·죽순·돼지고기 등의 재료를 채를 썰고 데친 다음 양념에 볶는 요리다. 소스는 굴 소스, 물 녹말, 마늘, 간장 등으로 만든다. 여기까지가 공식 조리법이다. 그러나 지난 3일 맛본 배영장(62) 주방장의 유산슬은 재료는 비슷했지만 유산슬이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졌다. 천화원은 거제 장승포항 바로 옆에 있다. 그가 만든 유산슬은 바다 맛이 났지만 짜지도 달지도 않았다. ‘담백한 중국음식’을 형용모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먹여 주고 싶었다.

천화원 배영장 주방장이 요리하는 모습.
“이기 문 연기 1951년도 …. 1·4 후퇴 때 왔그등. 이북에서 태어났지 …. 화굔데, 응. 이북 함흐(함흥)이지. 아버지는 산똥. 산똥에 일조시가 이쓰요. 우린 올 때는 할아버지까지 다 나왔으요. 요리는 내가 뜸뜸 학창 시절 (아버지를) 도와주긴 했지. 그땐 그래 했지. 요리는 본격적으로 스물두 살부터 했나?”

그의 유창한 거제 말은 화교라는 개인사와 잘 어울리지 않았다. 19세기 말 한국에 처음 들어온 화교는 일제강점기 무역업을 지배하다시피 했다. 해방 공간의 번영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배씨와 동료 화교 수백 명은 거제까지 피란을 갔다. 이웃 화교들이 부산으로 죄다 떠날 때 배씨 가족만 거제에 남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1970년, 지금의 2층 건물을 신축했다. 그 뒤부터 배씨는 장승포항을 바라보며 해물을 볶고 면을 삶았다. 그의 주방 창에선 장승포항이 보인다.

맛있는 음식을 먹자니 그에게 미안했다. 1960∼80년대 한국인들의 화교 억압은 상상을 초월한다.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으로 화교들은 고생했다. 6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이 화폐 가치를 절하하는 화폐단위 변경을 단행했다. 이론상으로는 액면가만 변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구매력이 하락했다. 대부분의 재산을 현금으로 보유한 화교들이 가장 큰 피해를 봤다.

삶의 생채기를 생각하면 맵고 짠 음식이 나올 것 같은데, 자장도 담백했다. 기름을 덜 썼고 무엇보다 인공적인 단맛이 없었다. 삼선 짬뽕은 더 담백했다. 보통 중국식당이 내는 짬뽕과 달리 고추기름 없이 해물 육수만으로 국물을 냈다. 시원하고 깔끔했다. 담백한 음식은 깨끗한 주방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3평 남짓한 주방은 구석구석 깨끗했고, 요즘 유행하는 오픈 키친처럼 요리하는 모습이 다 보였다. 배 주방장은 손님들의 시선을 약간 즐기고 있었다. 창피를 무릅쓰고 유산슬과 자장·짬뽕을 다 먹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도 속이 전혀 더부룩하지 않았다. 그의 음식은 장승포항처럼 담백했다.


⊙ 천화원: (055)681-2408. 경남 거제시 장승포동 232-29. 9시까지 영업한다.

거제=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제주도 자장면의 다른 이름, 원덕성원
제주도 자장면의 다른 이름, 원덕성원

서귀포에서 나고 자란 기자에게 ‘자장면=덕성원’이던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다니던 35년 전 덕성원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삶이 팍팍한 시절이었던 탓에 덕성원의 자장면은 ‘그림 속의 꽃’이었다.

취재에 나서기 전에 서귀포와 인연을 갖고 있는 선배 두 분에게 덕성원에 가 본 적이 있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한 선배는 “덕성원 자장면이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먹어보지 못했다”는 답변이었고, 비교적 넉넉히 살았던 또 다른 선배는 “가족 행사 때면 덕성원에서 자장면을 먹었다”고 했다.

서귀포 시민들에게 덕성원은 ‘시민 중국집’이나 다름없었다. 중·고교 시절 친구들끼리 ‘내기 축구’를 해도 허기진 젊은 배들을 채우려고 가는 곳은 덕성원이었다. 친구와의 약속 장소도 덕성원을 기준으로 할 정도였으니까. 40대 이상의 서귀포 시민들 가운데 덕성원을 모르면 서귀포 출신이 아니라는 말.

이 덕성원이 60년이 됐다. 원덕성원(原德盛園. 덕성원 본점) 사장 왕옥해(40)씨에 따르면 조부가 일제강점기 시절 제주도에 와 정착하고 1945년 제주시에 작은 자장면집을 열었다고 한다. 그러다 1950년 서귀포로 넘어와 당시 사귀면 내에서 가장 번화가였던 솔동산 거리에 둥지를 틀고 ‘덕성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부친(왕복안)이 평생 운영하다 4년 전 장남인 현재의 옥해씨에게 넘겨줬다.

왕 사장의 숙부도 서귀포에서 ‘덕성루’를 오래 운영했다. 덕성원은 도로를 확장하면서 삼일빌딩 앞으로 옮겨 10여년 정도 운영한 뒤 다시 옛 자리에서 운영하다 2005년 10월 바로 뒤편에 3층짜리 덕성원 건물을 지었다. 서귀포시 중문동에는 둘째가 2호점을, 제주시 일도 지구에는 셋째가 3호점을 냈다.

원덕성원 게짬뽕.
취재차 지난 5일 찾아간 덕성원은 옛날 덕성원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깨끗하고,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들이 부지런히 손님들에게 음식을 내는 모습이었다. 상전벽해는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던가!

이곳의 ‘게짬뽕’이 유명세를 탄다고 한다. 자장면으로 유명한 중국음식점으로 알았는데 ‘짬뽕’도 아니고 ‘게짬뽕’이라니. 다른 곳에 없는 메뉴가 등장한 연유를 물어봤다. “꽃게를 집에서 자주 먹었는데 맛이 괜찮아 메뉴로 개발해 보자고 했다.” 이렇게 태어난 게 짬뽕이 인기 메뉴로 자리 잡은 지 10년이 됐다.

게짬뽕은 각종 해물과 함께 끓인 꽃게 육수를 사용하고 푹 곤 꽃게 한 마리를 먹기 좋게 잘라 집어넣었다. 일반 짬뽕이 붉은색을 많이 띠는 데 비해 금방 나와 뜨거운 게짬뽕은 꽃게를 넣은 탓인지 거품이 일었고, 붉은색이 덜했다.

진한 게 향과 함께 된장을 풀어 넣은 게짬뽕은 일반 짬뽕에 비해 시원하고 얼큰했다. 전날 술을 마신 주당들에게는 깊은 맛이 우러나 해장에 좋고, 일반인들에게는 색다른 맛으로 다가갈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의 전통 메뉴는 자장면이다. 면이 쫄깃쫄깃하고 자장 향이 진해 깊은 맛을 보여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었다.

“전통이 그냥 나오는 것은 아니죠. 역사가 음식을 만듭니다. 오죽이나 프라이팬을 불에 많이 댔으면 밑창이 구멍 날 정도겠습니까?” 왕 사장의 말이다.

⊙ 연락처: (064)762-2402.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정방동 474. 9시까지 영업하며 마지막 주문은 8시다.

서귀포=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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