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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싱글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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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esc] 김도훈의 싱글 라이프
풀만 먹는 남자? 초식남(草食男), 혹은 식물남(植物男)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땐 ‘채식주의자 남자’의 한국식 변용인 줄 알았다. 일본 칼럼니스트 후카자와 마키가 처음으로 사용한 ‘초식남’은 남자다움에 구애받지 않는 온화한 남자들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초식남은 돼지껍질 구워 소주 한잔보다는 홍대와 청담동의 작은 카페에서 드립 커피와 와플 한 조각을 선호한다. 여자친구에게 어드바이스를 해줄 정도로 패션과 미용에 대한 지식이 풍요롭다.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는 연애보다는 취미생활에 더 관심이 많다. 이쯤 되면 몇몇 여성 독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할 거다. “내 주위에도 이런 화상들 있지”라며 말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초식남을 좋아하는 건 철없고 연애 경험 부족하고 남자에 대한 환상이라는 망상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10대와 20대 초·중반 여자들이다. 내가 아는 모든 20대 후반에서 30대 (그러니까 철들었고 연애 경험 많고 남자에 대한 환상 따위 손톱만큼도 없는) 여자들은 초식남 따위 애완견이나 주라며 몸서리를 친다. 요는 이거다. 외모도 잘 꾸미고 취향도 근사하고 매너도 끝내주는데다가 말까지 잘 통하는 남자를 만났다. 그런데 아무리 만나고 또 만나도 관계에 진전이 없는 거다.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부러 안기기라도 하고 싶지만, 우아한 카페에서만 만나다 보니 팔목 한번 잡힐 일 없다. 아는 에디터가 말했다. “질색이야, 그런 남자들. 나는 육식남이 좋아. 한번 넘어뜨려 보겠다고 콧김 뿜으면서 기를 쓰는 남자들.” 그녀는 물론, 30대다. 왜 초식남들이 등장했는지를 밝히는 건 사회학자들 몫이니 신경 쓰고 싶진 않다. 분명한 건 초식남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거다. 게다가 초식남들은 다양한 방향으로 진화도 한다. <씨네21>에도 변종 초식남이 있다. 털털한 외모에 그윽한 전라도 사투리가 매력인 ㅇ기자는 보통의 초식남들과는 다르다. 그는 카페보단 소주와 냉동 삼겹살을 좋아한다. 패션과 미용에 해박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연애가 하고 싶다 말은 하면서도 연애하는 걸 지난 5년간 보인 적이 없다. 대신 ㅇ기자는 주말마다 카메라를 들고 발레단 연습 무대를 찍으러 간다. 그가 찍은 무용수들의 사진을 보면서 나는 깨닫는다. 거기에는 발레복의 치마 밑을 훑는 듯한 30대 남자적 엉큼함이 조금도 없다. 사진에 대한 열정과 예술적 아름다움만 오롯하다. 그런 게 바로 연애와 성적 욕구를 초월한 변종 초식남의 취미생활이다. 그렇다면 난 대체 뭘까. 나는 초식남들이 들끓는 홍대와 청담동보다는 통의동과 부암동의 카페가 좋다(물론 싸구려 와플 따위도 먹지 않는다). 여자친구에게 조언할 만큼 방대한 패션과 미용에 대한 지식? 나는 방대한 지식을 수집하는 단계를 이미 졸업해 정제된 나만의 브랜드와 사용법을 확립한 지 오래다. 연애 대신 취미생활에 몰두하는 게 아니라 아예 생활과 직업을 취미화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초식남을 넘어선 이 단계를 뭐라고 해야 좋을까. 분재남? 온실 화초남?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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