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4.22 19:09
수정 : 2009.04.26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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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대한민국 좋은 간판상’ 수상작인 안경전문점 ‘보보스’(간판문화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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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서울시 정책으로 질서 잡히는 도심 간판들 …
일률적 권고 넘어 주인의 개성과 멋 드러나길
시인 윤동주는 1930년대 “집집이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도 없이”라며 ‘간판 없는 거리’를 꿈꿨다. 시인 이문재도 1990년대 말 “간판을 보지 못하는 날이 (내가) 죽는 날일 것”이라며 간판의 범람에 대해 적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간판 없는 거리는 상상일 뿐, 거리엔 자신을 광고하는 간판들로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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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청동에 위치한 갤러리 ‘아트링크’는 한옥 건물과 알파벳 서체를 조화롭게 배치했다.(이종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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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계동길에 위치한 영화사 ‘비단구두의’ 간판.(이종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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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나무, 새 이미지로 간판을 만든 서울 안국동의 ‘아원 공방’. ‘2008 대한민국 좋은 간판상’ 수상작.(간판문화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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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전달에서 미학적·장식적 가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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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계동에 위치한 오래된 천막 간판.(이종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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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엔 어느 때보다 거리 간판의 변화가 눈에 들어온다. 무질서하던 간판 대신 이전보다 정교하고 세련된 ‘질서 있어’ 보이는 간판이 등장해, “너무 많고, 너무 크고, 너무 튀었던” 대한민국 특유의 간판들이 차츰 사라지고 있다. 비좁은 거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검고 붉은 글자들, 빗물과 바람으로 일부가 떼어져 나간 이미지, 현란한 조명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에 급급했던 간판들이 이제는 ‘간판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변화의 한가운데에 섰다.
근래 서울 강남대로와 구로의 창조길 등을 걸어본 적이 있다면, ‘복잡한, 정신없는’ 따위의 단어와 간판이 더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란 걸 체감할 수 있다. 건물 외벽에 입점 업체를 알리기 위해 설치된 세로형 연립 간판은 일정한 모듈로 나뉘어 통일성 있게 설치돼 있다. 마치 에스에프(SF) 영화에 등장하는 매끈한 건물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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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안에 위치한 환전소의 간판.(이종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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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에 위치한 미니벨로 전문매장 ‘르벨로’는 달리는 자전거의 이미지를 보여준다.‘2008 대한민국 좋은 간판상’ 수상작(간판문화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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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곳곳의 간판이 눈에 띄게 변화한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서울특별시 디자인총괄본부가 진행하는 서울시 ‘간판이 아름다운 거리’ 사업의 성과다. 2007년 종로 대학로, 중구 남대문로, 구로 창조길 등 ‘디자인 서울거리’ 사업에서 선정된 10개 지역1500여개의 간판이 개선된 이후 2008년부터 지금까지 영등포의 여의나루길, 강동구청 앞길, 서초 반포로 등 20여개 지역이 2차로 선정돼 간판 개선 사업이 한창이다. 서울시는 이전 간판을 떼어내고 새 간판을 만드는 점포당 150만원의 제작비를 지원하고 ‘간판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좋은 간판 만들기의 10원칙을 내놓았다. 원칙은 간판을 미학적 대상보다 옥외광고물이라는 효용적 측면에서 전제한 뒤 사회적 공공재의 측면에서 바라본다. 하지만 ‘크기가 아닌 질로 승부할 것’, ‘너무 많이 달지 않을 것’, ‘글씨는 여백을 두어 적용할 것’ 등 다듬어진 서체, 상징 조형 이미지, 고유 색상 등 좋은 간판 디자인에 대한 기본 요건을 담고 있다는 점에선 시사점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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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이 아름다운 거리’ 사업에 의해 개선된 서울 천호동 신라빌딩의 모습.(서울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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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법적 강제성은 없지만, ‘간판이 아름다운 거리’에 선정된 지역에선 간판 제작할 때 서울시에서 내놓은 세부적인 권장사항을 따른다. 서울시청의 이양섭 디자인서울총괄본부 도시경관 담당관은 “건물의 간판이라는 사유재산을 일률적으로 관리하는 데 주민들의 반발과 협조가 반반이다. 강동구의 문방구 거리처럼 공간의 정체성에 맞는 간판 디자인을 권장하는 등 점차 세부적인 방안들을 세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24일까지 강동구청에서 열리는 ‘좋은 간판 전시회’는 서울시에서 내놓은 간판 정책을 살펴볼 수 있는 적절한 기회다. ‘간판이 아름다운 거리’ 사업에 의해 변화된 간판은 일단 노란색, 붉은색 등의 원색이 줄어 시각적인 자극이 덜하고, 글자 크기와 간판의 크기도 줄었다. 올림픽로의 개선 전후 간판 사진을 보면 변화가 눈에 들어온다. “가로형 간판은 입체문자형을 권장하며, 부분조명을 권장”한다는 지침에 아귀다툼을 하는 것처럼 자기 목소리만 내던 간판들이 통일성 있는 간판으로 정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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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계동에 위치한 오래된 병원 간판.(이종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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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의 한 병원 건물을 설계한 오영욱 건축가는 간판을 달며 ‘옥외광고물 디자인 가이드라인’에 따라 간판 재질과 조명 등의 세부적인 선택사항을 결정했다. 그는 “무질서한 간판을 정비한다는 의도에는 동의하지만, 최근엔 젊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나 건축가 등이 개성 있는 간판을 제작하는 경우도 많은데 일률적인 권고가 아쉽다”고 했다. 글자 없이 안경을 선으로 그려놓은 안경집이나 꽃을 그려놓은 꽃집, 서예 느낌의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간판 등 최근 홍대앞, 삼청동, 논현동 등을 중심으로 생겨나는 매력적인 간판들을 오히려 막을 수 있다는 비판이다. 이제껏 글자, 즉 상점 이름이라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초점이 있던 간판 디자인에 그림, 인테리어 개념이 스며들면서 나무 재질을 전문으로 하는 간판회사도 생겼고, 배관용 피브이시(PVC) 파이프로 감각적인 사인물을 만들 만큼 세련된 간판이 늘었다.
5년 동안 서울의 간판을 탐방해 디자인 잡지에 연재했던 이종훈 디자이너의 의견도 같은 맥락이다. 간판을, 질서 있게 통일감을 준다는 식의 ‘정리’의 개념으로 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독특한 한글 붓글씨로 쓰여 근대사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서울 계동의 ‘최 소아과 의원’이나 충무로 인쇄골목의 오래된 무지개색 간판 등이 보여주는 매력을 강조하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 상점 주인의 독특한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게 일률적인 규제보다도 중요한 간판의 미학 아니냐”고 반문했다.
간판이 모여 어떤 경관을 만드느냐가 중요
2000년 간판을 주제로 한 최초의 전시였던 ‘간판을 보다’전(예술의 전당)을 통해 “간판은 광고가 아니라 주요한 시각문화”라는 걸 주장했던 최범 간판문화연구소 소장은 간판 제작자들을 대상으로 한 ‘간판문화학교’를 열고, ‘대한민국 좋은 간판상’을 운영해 왔다. 그는 “새마을운동 진행하듯 일률적인 정책만으로 제대로 간판을 바꿀 수는 없다. 좋은 간판은 삼청동이나 전북 진안군 백운면의 예처럼 지역의 사회적 특성과 간판의 시각적 개성이 잘 어우러질 때 완성된다”며 “간판 하나하나보다 이것들이 모여 전체적으로 어떤 경관을 만들어내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현시원 기자
qq@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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