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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4.22 19:25 수정 : 2009.04.22 19:27

국순당연구소 신우창 부소장의 음주측정기

[매거진 esc] 너는 내운명





국순당연구소 신우창 부소장의 음주측정기

요리 관련 만화를 보다 이런 표현을 봤다. “불타는 듯한 격렬함, 그리고 정열이 정열을 부르며 환희가 되어 메아리쳐요. 이 와인은 투우사, 엘 마타도르야!” 맛은 주관적이므로 자기만의 언어로 맛을 표현하는 건 죄가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동일한 음식이나 술에 대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싶다면 이 단계를 벗어나야 한다. 공통의 언어가 없으면 논쟁도, 평가도 있을 수 없다. 와인 종주국에서 정교한 아로마휠(풍미를 표현하는 언어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한 표)이 발달한 이유다. 아로마휠은 혀와 혀가 만나게 하는 에스페란토다.

신우창(41. 사진) 국순당연구소 부소장이 지난해 프랑스 남부 코냐크 시에서 와인과 코냑을 공부할 때 부러워한 것은 포도밭을 휘감던 샤랑트 강 풍경도, 양조 기술도 아니었다. 코냑을 가르치는 학교와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이었다. 대학에서 미생물 유전학을 전공한 신 부소장은 국순당 입사 뒤부터 술을 공부했다.

우리 선조도 맛과 향을 과학화한 용어 체계를 갖고 있지 않았을까? 매일 <음식디미방><주찬><임원십육지><규합총서> 등 요리·농업과 관련한 조선시대 고문헌 번역본을 뒤적이는 게 신우창 부소장의 일이다. 그런 그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전통주를 복원하는 일에 ‘상상력’이 중요한 이유다. 지금 연구소는 양조 과정을 과학화해 단맛, 신맛 등을 1∼5점 사이의 수치로 구체화한다. 그러나 고문헌에는 그저 “여성들이 좋아할 맛이었다”고만 표현돼 있을 때가 많다. 최신 기술을 동원해 양조법을 추측하고 문맥을 짐작해 풍미를 평가해야 한다. 가끔 문헌대로 만들었는데 맛이 없을 땐 ‘설마 선조들이 이리 맛없는 술을 마셨을까?’란 생각과 ‘수백년 뒤 후손들의 입맛이 바뀐 걸까’란 역사적 고민에 빠진다.

신우창(41) 국순당연구소 부소장
그는 매일 국순당의 모든 제품·시제품을 시음한다. 한 번에 대여섯 잔씩, 하루 5~6차례 시음한다. 풍미만 느끼고 뱉는 양만 375㎖짜리 술병으로 대여섯 병. 가끔 목 넘김을 검사해야 할 때도 있어 매일 375㎖짜리 술 한 병 정도를 마신다.

그래서 바지 뒷주머니에 꽂힌 음주측정기는 보험이다. 20여만원을 주고 인터넷에서 샀다. 연구소가 성남 외곽지역에 있어 차를 몰고 퇴근하는데, 퇴근 직전 시음했을 땐 덜컥 겁이 난다. 그때마다 음주측정기를 분다. 측정기의 ‘삐’ 소리는 생명을 살리는 버저다. 이렇게 음주측정기를 혹사하니 두세 달에 한 번 새로 사야 한다. 기자가 농담 삼아 “회사에서 음주측정기를 사주는 대신 혀와 입에 보험 들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곱슬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식민지, 분단을 거치며 전통주가 뿌리 뽑힌 게 아쉽다”는 말은 기자에게 하는 영업 멘트로 들리지 않았다. 동그란 동안과 웃을 때 작아지는 눈이 고집 세 보였기 때문이다. 혀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10여년 피우던 담배를 최근 끊고 좋아하는 커피도 ‘하루 한 잔’ 원칙을 고수하는 그는 고집쟁이 장인이다.


글 고나무 기자·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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