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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원색으로 돌아오는 복고 유행 / 그래픽 이상호 기자 silver3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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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손담비 ‘토요일 밤에’·빅뱅 ‘롤리팝’ 강렬한 원색으로 돌아오는 복고 유행
모든 유행은 돌아온다. 몇 년 전까지 웃음거리로 기억될 뿐이었던 1980년대의 유행도 예외일 수 없다. 그 반짝거리던 인공의 미학은 2009년 벽두의 텔레비전과 대중음악, 그리고 패션쇼 런웨이를 점령하며 무사귀환을 신고했다. 다시금 세상은 원색과 ‘어깨 뽕’(숄더패드), 그리고 신시사이저 사운드로 물결칠 태세다.
시작은 가요계였다. 정확하게는 뮤직비디오의 스타일에서 변화의 징조들이 나타났다. 영화 같은 영상과 모노톤 화면 일색의 뮤직비디오들에 언젠가부터 컬러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화려한 조명과 세트, 그리고 원색의 패션들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소녀시대가 ‘지’ 뮤직비디오에서 채도가 높은 스키니 룩을 선보일 때만 해도 80년대 유행의 귀환을 단정하는 것은 다소 섣부른 일로 보였다.
붐업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끓는점은 손담비다. ‘미쳤어’의 후속으로 내놓은 신곡 ‘토요일 밤에’는 단순히 ‘80년대풍’이 아니라 80년대 음악 그 자체다. 그 옛날의 ‘허공 찌르기’ 디스코 안무를 완벽히 재현한 뮤직비디오는 또 어떤가. 많은 이들이 손담비의 음악과 뮤직비디오에서 김완선을 보았다. 거기에 신인그룹 유키스는 마치 80년대 말의 미국 댄스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연상시키는 음악과 기차놀이 안무로 80년대 복고 유행의 대세론에 기름을 부었다. 당대 남성 아이돌의 최전선인 빅뱅 또한 대오에 동참해 화려한 원색의 옷차림으로 달콤하게 ‘롤리팝’을 노래한다.
찌르기 디스코·숄더 패드·비비드 컬러
패션계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지난 2일 막을 내린 ‘2009 춘계 서울 패션 위크’에서 두드러진 화두 또한 복고였다. 어깨 라인이 강조된 재킷과, 이른바 ‘비비드 컬러’라 불리는 화려한 색감의 디자인들이 런웨이를 수놓았다. 박윤수와 이석태 등 상당수의 중견 디자이너들이 두드러진 80년대풍 복고 컬렉션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쿡 하는 순간 세계 청년문화가 바뀌었다’는 카피와 함께, 80년대 디스코 열풍의 도화선이 되었던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를 인용한 광고(CF)도 등장했다.
손담비의 어색한 롤러스케이트 퍼포먼스가 그다지 촌스럽거나 민망하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80년대 트렌드의 회귀는 먼저 유행의 주기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패션은 20~25년을 주기로 순환한다. 시기상으로 80년대의 유행이 돌아올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국외의 동향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토요일 밤에’를 작곡한 ‘용감한 형제’의 강동철은 “최근 미국의 팝음악에서도 복고적인 흐름들이 감지되었다”며 그러한 흐름들이 최근의 가요계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했다. 패션계 역시 마찬가지. 2009 뉴욕 컬렉션과 파리 컬렉션에서도 복고와 80년대의 재해석이 키워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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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안경, 반짝이 드레스, 두꺼운 벨트, 빈티지풍 핸드백 등 최근 많이 팔리는 80년대 스타일의 패션 아이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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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기론이 2000년대 이후로는 무의미해졌다는 견해도 있다. 패션지 <바자>의 수석에디터 오선희씨는 “패션에 있어서 60~70년대가 창조의 시대였다면, 80년대는 화려함을 과시하는 시대였고, 90년대는 마니아의 시대였다. 그리고 2000년대는 취사선택의 시대”라고 말한다. 즉, 2000년대에는 하나의 유행이 한 시기를 풍미하기보다 과거의 여러 트렌드들이 혼재하는 양상이라는 것이다. 멀티숍의 대두가 그러한 징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그는 지적한다. 80년대 복고 유행이 회귀한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2000년 밀라노 컬렉션부터 80년대 룩들이 선보이기 시작했고, 2007년에는 반짝이는 의상과 아이템의 ‘퓨처리즘’이 화두로 떠올랐다. 같은 시기 팝계의 대표적인 트렌드세터인 마돈나 또한 80년대풍의 패션을 선보인 바 있다. “80년대 음악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지금의 10대와 20대들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목표였다. 손담비 본인이 ‘멜로디가 좋다’고 이야기해 주었을 때 ‘토요일 밤에’가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는 ‘용감한 형제’의 말도 80년대 트렌드가 하나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러나 혼재하는 트렌드 중 하나로 보기에는, 최근 80년대 유행의 회귀는 가히 폭발적인 양상이다. 여기에 관하여 주기론과 트렌드론을 넘어서는 진단이 존재한다. 범세계적인 경제 불황이 80년대의 향수를 부추긴다는 것이다. 80년대는 자본주의가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던 시기. 올해 초 국외의 컬렉션들이 선보인 80년대 키워드에 대한 분석들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일본의 사례를 살펴보면 좀더 명확해진다. 일본에서 80년대 룩이 다시금 크게 유행했던 때는 2001년이었다. 톱 가수 하마사키 아유미가 2000년 말 <엔에이치케이>(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여 80년대 패션으로의 회귀를 선언한 이후 일본 전역의 빈티지 숍에서는 80년대풍의 구제 아이템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80년대 유행에 대해 당시 일본의 언론들도 장기불황의 시대에 버블호황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세간의 무의식을 읽었다.
모든 트렌드는 좋았던 시절을 좇는다
가요계의 80년대 유행에 대해서도 유사한 진단을 내릴 수 있다. 90년대 이래 한국 가요계의 주류는 일렉트로닉 댄스음악이었다. 컬처 클럽, 듀란듀란, 런던 보이스 등의 이름으로 기억되듯,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가장 휘황했던 시절 또한 80년대였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대조를 보이는 것이 현재 한국의 록음악 트렌드다. 최근 인기몰이중인 ‘장기하와 얼굴들’을 비롯하여 몇몇 인디밴드들, 그리고 YB(윤도현 밴드)의 신곡은 명백히 70년대 록 사운드를 표방하고 있는 까닭. 댄스 음악의 황금기가 80년대였다면 록 음악이 상업적으로 포장되기 전, 순수한 쾌락을 선사했던 마지막 시기는 70년대였다. 말하자면 패션과 음악을 막론하고 현재의 모든 트렌드들은 가장 좋았던 시절의 기억을 좇고 있는 셈이다.
호황의 꿈을 되새김하는 80년대의 유행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토요일 밤에’의 ‘용감한 형제’도 “가요계에 쏠림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올여름까지는 복고 유행이 대세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패션계 전문가들도 컬렉션에서 선보인 새로운 시도들이 대중화될 때까지 시차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세계를 강타한 불황의 끝이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글 조민준 객원기자 zilch321@empal.com·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사진제공 플레디스 엔터테인먼트(손담비), YG 엔터테인먼트(빅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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