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5.20 18:27
수정 : 2009.05.20 18:27
[매거진esc] 싸움의 기술
꽃이 만발한 4월 어느 날, 이곳 상암 영화창작공간에서는 감독들을 모아놓고 정신과 전문의가 와서 이름하여 ‘아무도 모른다 - 정신감정을 통해 알아보는 숨겨진 내면의 진실’이란 창작지원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무한도전>에 출연하여 정신감정을 했던 화제의 그 의사 선생님이 앞 강단에 서 계셨고, 날밤 새우며 시나리오와 씨름을 하는 감독들이 좀비처럼 하나둘 세미나실에 모여서 열 가지 유형의 인격장애를 듣고 있었다. 여러 유형이 나올 때마다 움찔움찔, 모두 ‘나야, 나’ 반응했다.
그런데 왠지 그 강의를 들으며 밤새 열 가지 유형이 아니라 백만 가지 유형의 인간형을 탐구해서 써야 할 감독들이 모두들 정신과 의사의 말에 고해성사를 받듯이 안심하는 표정이 되는 느낌이 암흑의 포스처럼 번져 나갔다. 함께 준비하는 감독이랑 열 가지 유형에 모두 해당된다며 낭패한 표정을 주고받을 때 코미디를 잘 만드시는 어떤 감독님이 질문을 했다.
“처방전 없이 항우울증 약을 먹을 수 있나요?” 그의 질문에서 이 불면의 난지도의 밤이 얼마나 외롭고 처절한 싸움인가가 느껴졌다. 그나마 나와 함께 작업하는 감독은 와글더글 싸우고 화해하면서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데 다른 감독들은 스스로가 이 외로운 공간에서 창조한 캐릭터와 홀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화해도 없다. 캐릭터에 지지 않기 위해 항우울증 약을 물어보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유럽에선 하수구에 가장 많이 버려지는 약이 ‘프로작’이란 이야기를 해주었다. 순간 이곳의 우울지수는 난지도가 아니라 은하철도999에 나오는 혹성이 되어버렸다. 하긴 여기는 수색차량기지 옆이니 그럴 수밖에. 감독은 버려진 혹성에서 그 무언가를 창조하는 ‘캐바보’들이다.
김정영/오퍼스 픽처스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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