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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그리니치 천문대 표준시계(왼쪽) VS 시분침이 하나, 숫자도 쓰여있지 않은 디자이너 차일구의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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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현시원의 디자인 극과 극
남편들은 말한다. “옆집 남편과 나를 비교하지 마.” 아이들도 말한다. “엄마 친구 아들과 나를 비교하지 말아주세요.” 그런데 어쩌면 좋을까? 비교는 너무 재밌는 걸. 너랑 내가 배짱이 맞는지 주판알을 튕겨보고, 어디서 어긋날지 차이를 예상하는 것도 재밌다. 비교의 대상이 세상의 끝에 있는 너무도 다른 두 존재라면 극적인 반전과 드라마가 개입할 여지도 커진다. 기준 자체가 시시때때로 변하는 세상에서, 정답이 없어 더 재밌는 ‘비교해서 보기’를 멈출 이유가 없다.그래서 처음 주목하는 건 세상의 끝에 있는 시계 디자인의 극과 극이다. 시계 디자인처럼 이미지 연상이 빠른 것도 없다. 시계판 위의 숫자와 시침, 분침이라는 삼박자.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도 명확하다. 지금껏 시계 디자인의 변화는 무궁무진했다. 뉘른베르크의 자물쇠공 페터 헨라인이 1510년 경 회중시계의 전신인 휴대시계를 만든 것에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초가 타들어가는 캔들 클록, 시계추가 움직이는 벽시계, 프랑스 혁명 땐 십진법 시계도 있었지만 언제나 숫자는 빠지지 않았다.
가장 정확한 시계로 자타가 인정하는 시계도 역시 숫자가 핵심이다.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 표준시계’는 1851년 회의를 통해 정해진 본초 자오선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12시간이 아니라 24시간이 전부 다 표시되어 있다. 로마자 숫자가 다닥다닥 비좁게 붙어 있고 5분 단위로는 아라비아 숫자가 또 쓰여 있다. 시력 나쁜 할머니들도 잘 볼 수 있을 만큼 설명적이다. 1913년 조선의 잡지 <아이들보이> 한 코너에 실려 있는 “시계는 거짓말쟁이예요. 왜 12 다음에 1이 와요?”라는 콩트가 들어설 자리 없는 무뚝뚝한 시계다. 시침과 분침이 나오는 한가운데 큼지막하게 쓰인 ‘shepherd patentee’는 뭘까? 사전적으로는 ‘셰퍼드의 전매특허권’이라는 의미. 지금은 세계 어떤 디자이너가 만들어도 특허권 따위와는 상관없을 전형적인 시계 디자인을 건 투쟁이 읽힌다. 추 대신 전자를 활용한 동력으로 시·분침이 우에서 좌로 이동하는 전자시계의 구조와 형태가 ‘(찰스) 셰퍼드 것’임을 주장한 대목이다.
그런데 지난해 영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디자이너 차일구가 만들어 ‘국제 디자인 어워드’에서 상까지 탄 시계에는 숫자가 없다. 시계 침도 하나다. ‘시간의 흔적’(traces of time)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 괴상한 시계는 숫자 없는 하얀 칠판이 몸통의 전부다. 사용자가 직접 무엇이든 그리고 쓸 수 있다. 재밌는 건 시침이 칠판 지우개라는 사실. 밤 9시에 기상이라고 쓰든 오후 5시에 식사 시간이라고 쓰든 자기 마음이다. 재기 넘치는 차일구의 시계는 시계 디자인에 스며든 사용자 중심의 ‘2.0 버전’이다. 이 시계는 숫자를 삭제함으로써 존재 이유를 보여준다. 세계의 무수한 디자인들은 내일이면 또 다르게 변화할 거다. 급행열차 탄 듯 변화하는 디자인 중에서 세상 끝에 서 있는 극과 극을 달려보려고 한다.
현시원 qq@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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