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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6.03 20:56 수정 : 2009.06.03 20:56

고마워요, 한 뼘이라도 더 수확해야 할 다랑논을 지리산길을 위해 내놓으신 분. 지리산생명연대 조회은 회원지기 제공

[매거진 esc] 독서광 노동효의 썸플레이스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속도의 문화를 느림과 성찰의 문화로, 위로만 오르는 수직의 문화를 눈높이 맞추는 수평의 문화로 전환하는’ 지리산길을 만들기 위해 사단법인 숲길을 창립했다. 산림청이 사업 지원을 하기로 했다. 다녀간 사람들은 이 길을 ‘지리산 둘레길’이라고 이르기 시작했다. 2007년 시범구간 개통으로 시작되어 2011년 전구간이 개통되면 300여 킬로미터에 이를 지리산길은 한 지점에서 한 지점을 잇는 선 모양의 길이 아니라, 지리산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둥근 모양의 길이다. 현재 개통 구간은 70여 킬로미터로써 시작과 끝이 있는 길이지만 모든 길이 이어지고 나면 시작도 끝도 없는 길이 된다. 전남, 전북, 경남 어느 도에서든 구례, 남원, 하동, 산청, 함양 어느 마을에서든 도보여행을 시작하고 끝낼 수 있다. 하루 7시간씩 걸을 경우 32.5일이 걸릴 것이라 한다. 그러나 전 구간을 다 돌았다 해도 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 달이 지나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다른 길이 되어 있을 테니. 같은 지점이되 꽃이 지고 꽃이 피고, 전혀 낯선 풍경 앞에 서 있게 될 여행자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길’을 만나게 될 것이다. 같은 것은 3개 도, 5개 시군의 이름뿐, 숲길, 고갯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 마을길은 다른 시간의 옷을 갈아입고 나그네를 맞이할 것이다.

초여름 지리산 길을 걸었다. 배낭 속에는 손때 묻은 책이 들어 있었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 이 책은 걷기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한 노래집이며, 걷기에 대한 ‘시적인 정의’들로 가득한 사전이다 -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세상의 모든 길은 땅바닥에 새겨진 기억이며 오랜 세월을 두고 그 장소들을 드나들었던 무수한 보행자들이 땅 위에 남긴 잎맥 같은 것’ ‘걷기는 시선을 그 본래의 조건에서 해방시켜 공간 속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 속으로 난 길을 찾아가게 한다’

그러나 책을 가져가긴 했는데 읽을 필요가 없었다. 지리산길은 그 자체로 걷기 예찬으로 가득한 ‘책’이자 자연과 마을, 문화와 역사를 잇는 ‘도서관’이었기 때문이다.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 소리, 냄새, 촉감이 끊임없이 말을 걸었고, 마을과 당나무와 숲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때론 땀이 흐르고 때론 비바람을 맞았지만 무지개가 뜨자, 나는 이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등고재를 넘기 전 무인 판매소에서 마신 동동주가 참 맛있었다. 혹자는 지리산이라 부르는 까닭을 지혜 지(智), 다를 이(異), 뫼 산(山), 지리산의 길을 걷고 나면 지혜가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브르통이 ‘인간을 바꾼다는 영원한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길의 연금술이 인간을 삶의 길 위에 세워놓는다’고 말했던 것처럼.

한편, 지리산길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끊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 현 정부는 2007년 20억이었던 지리산길 사업 예산을 2009년엔 10억으로 대폭 삭감했고, 사업 주체도 사단법인 숲길에서 지자체로 이관했으며, 사단법인 숲길 앞으로 책정된 2억은 집행하지도 않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지리산길의 목을 조르는 이유는 이 길이 노무현 참여정부의 흔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일까. 그래서 이젠 길도 죽이려는가.

노동효 여행작가·<길 위의 칸타빌레>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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