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6.17 20:39
수정 : 2009.06.2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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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광화문에 설치된 버스정류장 ‘더 플로’(the flow), 건축가 하태석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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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거리 풍경 바꾸는 새로운 디자인의 버스정류장…
지자체 홍보 로고는 빼주는 센스를
시인 기형도는 <정거장에서의 충고>에서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고 적었다. 그가 시에서 쓸쓸하게 추억했던 정거장은 실제 어떤 모습이었을까? 버스정류장의 이미지는 영화, 문학을 막론하고 마음 한구석에 애틋한 향수를 남기는 서정적인 장소로 묘사되곤 했다. 멈출 줄 모르는 도시의 속도가 잠시나마 정지하는 공간, 이동 수단을 기다리는 짧은 명상의 틈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름한 표지판, 덕지덕지 붙은 광고물, 딱딱한 의자 등 버스정류장의 실제 모습은 차라리 도시의 폐부를 훤히 드러내는 공간이지 휴식의 공간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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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동안 무주군의 공공건축물 프로젝트를 진행한 건축가 정기용이 설계한 무주군의 버스정류장.(기용건축사사무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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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된 울산대학교 김성식 교수의 버스정류장.(디자인 서울 총괄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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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제안 듣는 공모전도 활발
오랜 기간 차가운 철제 구조물로 방치되어 왔던 버스정류장 디자인이 최근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서울시의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개성 넘치는 아트형 정류장이 출현하더니, 공공디자인에 대한 인식 확산에 힘입어 지자체마다 도시 정체성과 공공디자인을 고민하는 버스정류장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 몇 지역에는 사진을 찍어 인터넷 블로그에 딱 올리고 싶은 독특한 디자인의 정류장이 출현했다. 대표적으로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 앞의 ‘아트셸터’와 흥국생명 빌딩 앞을 지키는 ‘더 플로’(the flow). 이름에도 ‘아트’가 붙은 전자가 정거장에 둘러앉아 옆 사람과 수다 떨고 싶은 여유를 선사한다면, ‘더 플로’는 도시의 밤에 푸른빛을 발사한다. 둘 다 기존의 예술과 옥외광고물의 범주를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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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디자인서울거리 조성사업 구간에 설치된 버스정류장.(디자인 서울 총괄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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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무로 재작된 울산시의 버스정류장은 시민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울산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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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시의 경우 구청마다 자율적으로 버스정류장 디자인 사업을 전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사업과 맞물려 작가, 디자이너들의 버스정류장 디자인에 적극적이다. 지난 4월 서울 강남 압구정로에 설치된 ‘체인징 워드’(Changing Words)는 공모를 통해 선정된 멀티미디어 작가 장혜진씨가 제작했다. 디지털 미디어 버스정류장답게, 발광다이오드(LED)로 나무(tree), 강(river)이라는 영어 단어가 버스정류장 위에 투사된다. 미디어 아티스트 바버라 크루거가 뉴욕의 전광판에 ‘너의 몸이 나의 전쟁터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등 정치·사회적 문구를 과감하게 발사했던 것에 비하면, 친환경적 메시지를 전하는 ‘착한’ 문구들이다.
최근 강남구 디자인서울 거리와 금천구청사 앞, 남산도서관 앞에 새롭게 제작 중인 정거장 세 곳도 일률적인 기존의 버스정류장 형태를 넘어섰다. 나무 등을 형상화한 정류장은 이젠 버스정류장이 공공 시각물로서 괜찮은 볼거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역 앞에 버스 환승 정류장이 생기면, 또 새로운 개념의 정류장이 생길 것이다. 도시가 소유한 시설물이지만 아트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며 다양한 버스정류장 디자인의 출현을 예고했다. 마을버스 상표표시제(poll sign)의 경우는 작년에 표준형 디자인이 정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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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가르시아 루비오가 설계한 스페인의 버스정류장.(justogarc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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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버스정류장.(하정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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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정류장은 도시를 상징하는 거대한 조형물 못지않게 도시의 경관을 좌우한다. 또 실제 주민들이 날마다 그곳을 지나가고 그 안에 서 있다는 점에서 일상과 훨씬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그런 이유로 최근 울산시, 광주시, 광명시 등 지자체는 새로운 버스정류장을 디자인하기에 앞서 시민들의 의견을 듣는 데 공을 들인다. 광주광역시는 지난해 ‘내가 디자인하는 내 집 앞 버스승강장’이라는 디자인 공모전을 진행해, ‘댄싱 셸터’라는 디자인 설계를 금상작으로 선정했다. 광주시 도시 디자인과 정내경씨는 “납품되는 기성품 디자인이 아니라, 실제 버스 이용 주민들이 상상하는 디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며 “작은 점토들을 하나씩 붙여 물결치는 듯한 정류장을 만들어낸 아이디어가 실험적이었다”고 했다. 전북 익산시 또한 시민들의 공모를 받아 시내 도심 지역과 농촌 지역에 적합한 버스 디자인을 개발해 갱신하는 과정에 있다.
그런가 하면 울산시에서 나무로 디자인한 버스정류장은 그 자체로 세련된 분위기를 풍겨 눈길을 끈다. 정류장의 큰 틀을 검은색 철제로 세우고 천연 목재로 제작한 뒤 크게 튀지 않는 물결무늬로 장식을 했다. 독특한 것은 외부 작가나 디자이너에게 발주한 것이 아니라 시청 건축주택과 도시디자인팀이 직접 제작했다는 점. 이 정류장을 디자인한 하정석씨는 “공공시설물의 주목적은 너무 튀지 않으면서 주변 자연, 도시와 잘 어울리게 하는 것이다. 비가 와서 나무 기둥이 젖으면 젖는 대로, 해가 쨍하면 쨍한 대로 환경을 받아들이는 정류장을 생각했다. 건물 양식과 콘크리트 등 도시 바닥이 정류장에 어떻게 어울릴 것인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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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리옹의 파르디외 버스정류장.(하정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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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시하야 시에 설치된 과일 모양의 정류장.(thewondro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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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같은 정류장, 수박 같은 정류장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유럽에는 예술적이고 독특한 정류장들이 많다. 사과 모양이나 수박 모양을 한 버스정거장도 있고, 피렌체에는 아예 정거장이 멋들어진 예술 가구처럼 거리에 즐비하다. 특히 독일 하노버는 1990년대 초 유명 디자이너, 건축가들과 협업해 버스정류장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뒤 예술적인 정거장이 있는 도시로 이미지를 구축해 전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디자인 평론가 최범씨는 “버스정류장은 시민들이 대중교통 수단을 만나는 인터페이스다.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려면 정류장이라는 채널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며 “버스정류장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삶의 형태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디자인의 공공성이 중요하지만 지자체 심벌이나 상징물을 크게 붙여놓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버스정류장이 지자체 홍보판은 아니지 않으냐”고 덧붙였다. 그런 점에서 건축가 정기용이 2000년 무주에 세운 버스정류장은 콘크리트 재질에 하나의 커다란 창문을 뚫는 것만으로 무주의 정체성을 시원하게 보여준다. 그림 액자처럼 네모난 창문 뒤로 짙푸른 산이 드러나, 주민들은 버스를 멍하게 기다리는 대신 산을 감상한다.
현시원 기자
qq@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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