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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첫걸음이 시작되는 검룡소에서 프러포즈를 한다면- 우리 사랑 여기서 발원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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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독서광 노동효의 썸플레이스 <침묵의 세계>와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
세상에서 ‘침묵’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들어간 책은 무엇일까? 내 짐작엔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일 것이다. 책 제목 탓에 펼치면 백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백지 대신 ‘침묵’을 주어로 한 문장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문장들 하나하나가 시가 되어 날아간다. 피카르트는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나왔던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돌아갈 또 하나의 침묵의 세계 - 죽음의 세계 - 사이에서 살고’ 있으며 ‘시는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 침묵에서 다른 침묵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침묵의 세계>를 읽다 보면 그가 쓴 문장이 시가 되어 이를 증명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지상에 아직 침묵이 존재하고 있음을 가장 근래에 느끼게 해준 장소는 검룡소였다. 굳이 피카르트가 얘기해주지 않더라도 도시란 이미 소음으로 가득 찬 공간이 아니던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한 소음 발전소, 서울에서 한강을 거슬러 태백의 검룡소로 갔다. 6년 전과 달리 오가는 길도 포장이 되어 있고, 주차장도 널찍하니 정비되어 있었다. 차를 세우고 길을 나섰다. 단체여행을 온 고등학생들이 떠들썩한 웃음을 터뜨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항상 교실 뒷자리에서 앉아있을 듯한 아이들이 느닷없는 비명을 지르며 지나갔다. 그리고 갑자기 숲은 정적으로 휩싸였다. ‘자연의 사물들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다. 침묵을 담는 그릇처럼, 침묵으로 가득 찬 채, 자연의 사물들은 거기 존재하는 것이다 (…) 산, 호수, 들판, 하늘은 인간의 도시에 있는 소음의 사물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침묵을 다 비워내 주려고 어떤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중 시간조차 멎어버린 것 같은 숲, 한가운데로 오솔길이 이어졌고 검은 나비, 흰나비가 날아올랐다. 침묵의 전령인 듯 수백 마리 나비들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의 발걸음이 다가오면 천천히 날아올라 길을 안내했다. 쉴 새 없이 나비들이 날아오르는데 소리가 없어, 무성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나비가 이렇게 많은 길은 처음인데?” “정말 신기하군.” 동행했던 M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눌 땐 침묵이 곁으로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개울을 건너자 푸른빛의 터널이 이어지고 한강의 발원지에 도착했다. 도시에서 추방당한 침묵이 웅크리고 있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에서 솟아올라 지상에 고이는 물 위로 뛰어내렸다. 하루 사이 수천 톤이 솟아오르는 물은 침묵을 머금은 뒤 푸른 이끼 사이를 지나 아래로 흘러갔다. 이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또다른 물줄기들을 만나며 서울의 한가운데를 관통한 뒤 바다로 갈 것이다. 피카르트는 침묵이 현대 세계에서 추방당한 까닭을 ‘수익성’이 없고, ‘목적성’이 없고, ‘생산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장자가 외물 편에서 말한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을 되새겨 본다면 우리들이 아직 침묵에서 배우고, 얻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피카르트의 책을 읽은 신경숙 소설가는 말했다. ‘실리와 유용의 저편에 있는 침묵이 사실은 가장 먼 데까지 퍼져나간 가장 성숙한 존재의 대지라는 걸’ 노동효 여행작가·<길 위의 칸타빌레> 저자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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