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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 코닉세그 CCX,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 람보르기니 가야르도, 엔초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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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쏙] 도로 위 ‘광란의 질주’ 301명 잡고보니…
빚까지 내가며 수억짜리 외제차 사고 빌리고…대포차도 상당수
속도경쟁에 과시경쟁…도로 막고 신호조작 ‘막 나가는 레이스’
스피드.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즐길 수 없는 세계다. 수초 만에 시속 100㎞에 이르는 페라리 같은 슈퍼카들은 부자 중의 부자들만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 꿈의 차로 마음껏 스피드를 즐기는 꿈을 꾸는 이들은 많았지만 실제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이들은 별세계의 극소수뿐이었다. 한국에서 이 꿈에 도전한 이들이 등장했다. 문제는 그들이 좀 ‘지나치게’ 이 꿈을 즐겼다는 점이었다. 지난 4월 수억원대의 외제 스포츠카를 몰고 시속 300㎞ 넘게 광란의 질주를 벌인 폭주족이, 그것도 300명이 한꺼번에, 경찰에 입건됐다. 이들은 엔초 페라리, 람보르기니, 마세라티 등 억대 스포츠카를 몰고 400m 직선도로를 질주해 승패를 가리는 일명 ‘드래그 레이스’를 벌이다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유례가 없을 만큼 대규모로 폭주족이 동시에 경찰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한국 슈퍼카 폭주족들의 세계도 얼떨결(?)에 드러나게 됐다. 이들을 조사한 경찰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조사대상자들의 면면에, 그리고 미처 몰랐던 슈퍼카 폭주족들의 세계에 여러 번 놀랐다고 한다. 그 뒷이야기를 <한겨레>가 들어봤다. 재벌들의 광란이 아니라 속빈 강정들의 몸부림? 이번에 경찰에 검거된 폭주족들은 모두 301명. 한 인터넷 사이트 회원들인 이들은 지난해 3월부터 11월까지 모두 722차례에 걸쳐 인천공항고속도로, 자유로, 서해대교 등에서 도로를 막고 드래그 레이스를 벌인 혐의를 받고 있다. 검거된 이들 중 건설업체 대표인 김아무개(42)씨는 마세라티 스포츠카 등 고급 외제차 5대를 몰며 드래그 레이스에 참여했다. 경찰은 4월 수사 발표 당시 김씨 외에도 치과병원 원장, 프로골퍼, 영화사 PD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여럿이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17억원을 호가하는 엔초 페라리와 10억원대의 코닉세그 등 슈퍼카로 불리는 고급 외제 스포츠카를 개조해 폭주를 즐겼다. 그러나 경찰이 검거된 301명을 꼼꼼히 살펴본 결과, 이들 가운데 80%는 고급차를 소유할 경제력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 관계자는 “20% 정도인 50명 정도는 정말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고, 나머지는 속 빈 강정들이더라”고 전했다. 이 나머지 250명의 대부분은 자영업자였고 무직자들도 50여명가량 있었다. 이들이 드래그 레이스에 끌고 나온 차 가운데 100여대는 국산차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차도 없으면서 레이스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다. 경찰은 80%에 해당하는 ‘서민 폭주족’ 250명 가운데 30% 정도인 80여명이 20대라고 밝혔다. 이들은 투스카니 등 국산 스포츠카 소유자들과 쏘나타 아반떼 카렌스 i30 등 일반 승용차의 성능을 업그레이드한 두 부류가 있었다. 최대출력이 200마력이 안 되는 투스카니를 개조해 600마력까지 올려놓은 사람도 있었다. 600마력이면 ‘슈퍼카’로 부르는 페라리 수준으로, 출력과 소음은 슈퍼카를 뺨쳤다고 한다. 빚으로 외제차 사서 라면 먹으며 할부금 갚아 서민 폭주족의 절반이 넘는 150명이 베엠베 벤츠 아우디 인피니티 따위의 수입차를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 빚을 내 차를 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차를 사는 동시에 차를 담보로 대출을 받는 방식으로 차를 샀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이들 상당수가 한달에 수백만원씩 차량 구입 자금을 갚아나가는 중으로, 경찰이 수사를 위해 차량 등기를 떼보면 대부분 근저당이 설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한 경찰 관계자는 “외제차를 모니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제 보니까 할부금 때문에 라면 먹으면서 외제차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렇게 어렵게 차량을 구입해서인지 차가 망가진다고 번호판을 달지 않고 차 안에 넣어놓고 다니던 사람도 있었다고 경찰은 귀띔했다. 특히 이들 중에서도 10% 정도는 명의가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는 이른바 ‘대포차’를 모는 이들이었다고 한다. 대포차는 가격도 시세보다 30% 이상 싸고, 특히 과속이나 위반을 해도 차주 추적이 되지 않아 벌금을 안 내도 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수입차를 렌트해 모는 등 상당수의 차량이 운전자와 차주가 달라 경찰이 수사하는 데 상당히 골머리가 아팠다는 후문이다. 검거된 이들 중에서 여성은 4명이었는데, 이들 가운데는 어린이 교통안전연구원으로 일하는 20대 여성도 있었다. 자동차의 100m 달리기 드래그 레이스? 이들은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와 자유로 등 차선이 넓고 직선주로가 많은 곳에서 모여 드래그 레이스를 벌였다. 400m를 달리는 드래그 레이스는 차 성능을 판가름하는 초기 가속 능력과 최대 토크 정도를 비교할 수 있어 자동차의 100m달리기로 불린다. 코닉세그 CCX의 경우 시속 100㎞ 도달 시간이 3초이고 최대 출력이 888마력에 이른다. 드래그 레이스는 차 두 대가 직선거리에서 일명 ‘짜봉’(붉은색 야광 경광봉) 신호로 출발해 우열을 가린다. 레이스 참가자들은 대부분 400m를 11초대에 주파했는데 이는 시속 218㎞에 이른다. 보통 승용차 같으면 아무리 밟아도 도달하기 어려운 속도다. 전문 레이서들보다는 떨어지지만 일반인들로서는 상당한 수준이라고 경찰은 밝혔다. 드래그 레이스에서 올린 최고 속도는 이아무개씨가 람보르기니로 기록했던 시속 359㎞였다. 이들은 경주를 위해 교통신호를 조작하기까지 했다. 레이스 차선 2개에 구경용 차선까지 3개 차선을 막고 다른 차들이 못 들어오게 의경 출신 회원을 시켜 교통신호를 조작했다. 경찰 단속을 피하기 위해 ‘ㅇㅈㄷㄹㄱA지역’(영종도 드래그 북쪽) 등의 암호를 써가며 인터넷과 무전기로 수시로 장소를 바꿔가며 레이스를 했다. 이렇게 치밀했지만 이들이 붙잡힌 것은 지독한 자동차 배기음 때문이었다. 시속 300㎞의 속도를 내는 슈퍼카들의 엔진 소음은 일반 차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게다가 차주들은 튜닝을 해 배기음을 더 크게 만들기도 했다. 이 때문에 레이스가 열리는 지역의 민원이 빗발쳤고 경찰이 수사에 나서게 된 것이다. 자동차를 자신과 동일시…수입차 클럽끼리의 경쟁으로 과열 빚내서 수입차를 사 위험한 레이스를 즐기는 이유는 뭘까? 스피드에 대한 동경도 있지만 자동차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심리가 깔려 있다고 경찰은 분석한다. 좋은 자동차로 자기 자존감을 확인하고 자동차 성능으로 이 자존감을 인정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검거된 폭주족들이 주로 활동하는 한 동호회 사이트에는 “회원 전용 클럽 파티를 개최하니 수입차를 끌고와 파티 후 옆좌석에 멋진 아가씨들을 앉혀서 돌아가라”는 글들이 올라오곤 한다. 이에 대해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일그러진 남성주의와 우리 사회의 물질주의로 빚어진 현상으로 지적했다. 곽교수는 “빚을 내서라도 벤츠 같은 고급 수입차를 구입해 그런 차를 타는 부유층과의 일치감을 느끼려는 과시욕이 읽힌다”며 “사람의 내면이나 가치보다 보이는 면만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라고 말했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 칼럼에서 “금력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려는 폭주족은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어떤 심리적 경향을 극단화하여 표현한다”고 분석했다. 경찰은 수입차 동호회 간의 경쟁심 때문에 드래그 레이스가 더욱 치열해졌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한 수입차 사이트 게시판에 후발 사이트 회원들이 레이스 동영상을 올리면서 한번 겨뤄보자고 도전장을 내민 것이 드래그 레이스로 불붙은 계기가 됐다고 한다. 여기에 20대들이 주축인 국산차 튜닝 동호회도 수입차들과 붙어보자며 끼어들어 경쟁 구도가 더욱 복잡해졌다고 한다. 단속에도 레이스가 계속 이어지는 이유다. 10억 차 몰아도 벌금 300만원에는 벌벌 하지만 이렇게 과감하고 화끈했던 폭주족들도 경찰의 수사에는 쩔쩔맸다는 후문이다. 경찰 수사가 한창 진행되던 지난해 말 관련 사이트에는 ‘경찰이 오라는데요 어떻게 하나요’ ‘벌금은 얼마나 될까요?’ 등의 애타는 질문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경찰은 소환된 폭주족들 대부분은 얌전한 사람들이 많았고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고 한다. 심지어 수입차를 몰며 드래그 레이스에 참여한 한 여성은 남자친구에게 혐의를 돌렸다가 남자친구마저 범인 도피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게 만들기도 했다. 폭주족 회원들은 서로에게 존칭을 쓰며 깍듯한 모습을 보여 수사팀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경찰이 폭주족 수사팀 명의로 출두요청서를 집으로 보내 가족들이 놀랐다며 경찰에 항의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 검거된 이들은 평균 3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이들이 낸 벌금만 무려 9억원에 이른다. 경찰 관계자는 “10억원이나 되는 차를 타는 사람들도 벌금 300만원이 아까워 벌벌 떨더라”고 말했다. 참가자들의 혐의를 일일이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경찰의 신문 조서만 모두 5만여쪽에 이르러 1t 트럭 한 대 분량이다. 국세청은 수입차를 모는 이들 중 별다른 수입이 없거나 자영업자들의 경우 이들과 이들 부모에 대한 세무조사를 할 방침이며 경찰에 명단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행 도로교통법상 ‘드래그 레이스’ 같은 공동위험 행위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벌금에, 형법상 일반교통방해죄는 10년 이하의 징역과 벌금에 처해진다. 이들은 경찰이 8·15 광복절 오토바이 폭주족을 단속하느라 바쁜 틈을 타 요즘에도 영종도와 자유로에서 드래그 레이스를 벌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권은중 길윤형 기자 detail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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